IMF위기가 한창이던 암담한 시절, 어느 선배가 학회 뒷풀이 자리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이제
경제가 어려워졌으니 경제학(또는 경제학자)의 시대가 온 것이 아닌가라는 자조 섞인 농담을 던
졌다. 그 자리에 있던 나를 포함한 제법 많은 숫자의 경제학자들이 각자 어떤 생각으로 그 말을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대부분 동의를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불경기의 폭과 깊이가 IMF보다 더 하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리곤 하더니, 한사코 경제위기설을
부인하던 정부나 경제관료, 나아가 대통령까지도 합리적 경기부양’에 대해 언급하기에 이르
렀다.
마침 열린 어느 경제학회의 각종 발표 내용은 재미없는 경제학회 뉴스치곤 이례적으로 거의 하루에 한 꼭지씩 박스기삿거리를 만들어 내면서 바야흐로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중이다. 수백 명의 경제학자가 참석했다는 그 학회에 얼굴도 내밀지 않은 주제인지라 논평할 자격이 있나 싶은것 은 물론 내가 경제학자는 맞나 싶기는 하지만, 어쨌든 직업이 경제학 선생인지라 경제학회 에 실리는 과도한 관심과 기대에 대해 한 마디 하고 넘어갈 필요는 있을 듯싶다.
글쎄, 집단적 명예훼손이라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사실이므로 얘기한 즉, 정치학자들이 예컨
대 경주나 제주도 같은 휴양지에 모여 학회를 열고 유력한 정치인을 데려다 한 마디 하게 하면
서 스폰서 받는 (쉽게 말해 밥 얻어먹는) 일이 간혹 있다는 말을 듣고, 그래도 우리 경제학계는 그런 일은 없다고 큰 소리치곤 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어차피 사회가 점점 투명해지는방향으로 갈 뿐 아니라 굶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 공짜밥 얻어먹을 일이야 없어졌겠지만, 경제학계 에서도 출세한 분들이 많다 보니 경제학회가 마치 정부여당과 야당, 혹은 이른바 좌파와 이른바 우파의 경연장처럼 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한 현상은 아마도 부쩍 높아진 경제에 대한 관심탓에 기삿감을 노리는 언론에 의해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여당과 야당의 경기극복에 대한 대안인 즉, 거시경제학 교과서의 케인즈주의와 공급측 경제학을
연상케 한다. 적절한 재정지출 확대를 통해 합리적으로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는 주장이 전자라
면, 세금을 깎아 주면 투자나 소비가 늘어날 것이라는 주장은 정확히 이십 여년 전 레이거 노믹스의 푸닥거리를 주도했던 래퍼라는 경제학자가 했던 주장의 재판으로 보인다. 오랜만에 교과서적 인 논쟁이 벌어지는 듯하지만, 전자는 소비심리나 투자심리가 위축되어 있는 상황에서 재정지출이 효과를 얻기 위해서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 같지 않고, 후
자 는 좌파’ 때문에 보따리 싸들고 도망갈 생각만 하는 불안과 도탄에 빠진 대기업이나 부자들
이 세금 깎아준다고 선뜻 투자와 소비를 늘릴 지에 대해서도 별로 고민하는 것 같지 않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등장해서 좌파 혹은 사회주의’ 선동을 일삼는 재벌기업 협의체가 만 든 연구기관의 장(분명히 밝히건대, 특정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인물이 바뀌어 도 역할은 전혀 변하지 않는 그 ‘자리’에 대해 말하는 것이니 부디 오해 없기를!)의 주장은 또 어떤가 어차피 밥줄이 재벌인 바에야 의식이나 행동이 밥줄 따라 가는 것이야 그 자체가 경제학의 불변의 진리이건만, 아직도 후진의 정치의식 속에서 헤매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좌파 라면 누구나 자연스레 떠올릴 수밖에 없는 ‘친북’의 이미지까지 노골적으로 들이대는 데에는 탄식을 금할 길이 없다.
도대체 좌파 정권’의 경제정책 탓에 경제가 어려운 것이라면서 간첩’을 민주화인사로 지정하는 것이나 서해교전을 들먹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백번 양보해서 사회의 전반적인 좌경 화 때문에 기업가들이 불안감을 느끼고 그래서 투자도 소비도 하지 않는 바람에 경제가 어려워 졌다고 하자. 아무런 현실적 근거도 없이 결과의 불평등을 추구하는 정책이라든지, 남미 포퓰리 즘 정권의 실패 운운하면서, 한 술 더 떠 능력에 따른 불평등이 불가피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성장을 위해 지극히 바람직한 조건으로 옹호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경제학자들이 (그것도 유명하거나 그럴 듯한 직함을 지닌 경제학자들이) 경제원론 교
과서에 나오는, 한마디로 공자님 말씀으로 여겨지는, 시장원리를 중시해야 한다는 정도의 원론적인 발언만 해도 그것은 즉각 좌파’정권에 대한 이론적 비판으로 승격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어차피 사회과학이란 것이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 것일진대, 밥줄 따라 또는 하다
못해 마음에 드는 정치인이나 세력 따라 가는 것도 나쁠 리야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편 으로는 개발독재에 대한 향수나 솔솔 부추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원리를 하늘처럼 떠받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공격과 경제정책 비판을 혼동하는 정도의 수준으로야 오랜만에 다가온 경제학 르네상스(?)를 살리는 것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이데올로기의 역할조차 수행할 수 있겠는가.
류동민의 비판경제학 이데올로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