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선거제도 개선 논의에 관한 검토 (주제발표)
최근 국회의원선거의 석패율제 도입을 둘러싸고 정치권에서 뜨거운 논란이 일고있다,
한나라당(새누리당)과 민주당은 지역주의 완화를 위해 석패율제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통합진보당을 비롯한 군소정당들은 석패율제 도입에 적극 반대하는 양상이다.
이에 따라 학계를 비롯한 시민사회에서도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편방안에 대한 논의가 다시 불붙기 시작이다.
사실 국회의원선거제도의 개편 방향과 관련해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논의가 있어 왔으며, 최근의 논의 또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이러한 점에서 이 발제문의 논의 또한 새로운 쟁점이나 새로운 방안을 제시하기보다 기존 논의를 정리하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석패율제 도입과 관련된 정치권의 최근 논의는 다른 무엇보다 먼저 보다 근본적이고 원칙론적인 입장에서 선거제도 개선논의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국민의 정치적 불만이 그 어느 때 보다 강하고, 정치개혁의 필요성이 매우 강조되는 현재 상황에서 선거제도개선의 문제를 단기적인 정치적 이해에서 다루기보다 선거제도의 개선이 정치개혁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매우 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선거제도의 개선 문제를 지역정당구도 문제와 연결시키는 경향이 강한데 지역정당구도가 약화되어가고 있는 현실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석패율제 도입 논의와 관련
석패율제는 현재 일본 의회선거에서 채택되고 있는 제도를 모형으로 본적으로 1인 소선거구에 출마한 다수의 후보자를 비례대표 명부의 동일 순위에 중복 입후보할 수 있도록 하고, 선거결과 비례대표 동일 순위 후보 가운데 소선거구에서 가장 작은 득표율 차로 낙선한 후보를 비례대표 당선자로 결정하는 제도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일본의 경우 권역별 명부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권역명부의 동일 순위에 해당 권역의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자 가운데 최대 10명까지 중복공천을 허용하고, 이들 중복 공천된 후보 가운데 석패율(낙선자 득표수/당선자 득표수100)이 가장 높은 후보가 비례대표 당선자로 결정하고 있다.
현재 도입이 논의되고 있는 석패율제는 한국적 현실을 감안하여 일본식의 석패율제를 다소 변형한 것으로 소위 ‘지역구 결합 비례제’ 등으로도 칭해지고 있다.
현재 석패율제 도입 주장의 핵심적 근거는 석패율제를 통해 지역주의 완화 효과를 기대할 수 있.
찬성론에 따르면 석패율제의 지역주의 완화효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기대될 수 있다.
첫째, 영남지역 지역구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한 민주당 후보 가운데 일부가, 그리고 거꾸로 호남지역 지역구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한 한나라당 후보 가운데 일부가 석패율 제도를 통해 당선됨으로서 양당의 불모지인 영남과 호남 지역에서 정당기반을 구축할 수 있다.
둘째, 양당이 상대 지역에서 후보공천조차 어려운 현실에서 석패율 제도는 경쟁력 있고 역량 있는 후보자들의 지역구 출마를 독려하고, 이들의 지역구 출마를 통한 경쟁력 향상을 통해 궁극적으로 지역구 당선을 가능케 함으로서 정당의 지역기반을 구축할 수 있다.
광역 시도단위 1인을 기초로 석패율제를 실시할 경우 석패율제를 통해 구제-당선될 수 있는 의석은 한나라당의 경우 3석(광주, 전북, 전남)이며, 민주당의 경우 5석(부산, 대구, 울산, 경북, 경남)이다..
전체 의석수, 각 지역의 인구규모와 정당지지율을 고려할 때 한나라당이 석패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의석은 호남지역의 정당지지에 상응하나, 민주당의 경우 50% 수준에 못 미침. 즉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채택할 때에 비해 지역정당구도 완화 효과는 제한적이며, 상징적 효과에 그친다고 볼 수 있다.
석패율제 도입을 통한 두 번째 측면의 지역주의 완화 효과 역시 기본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사실 지금까지 영남에서 민주당 후보가, 그리고 호남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되지 못하거나 출마 자체가 제한적이었던 것은 선거 제도 때문이 아니라 유권자들의 정치적 태도와 정당의 무관심, 그리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역주의 자체를 선거에 악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찬성론의 주장처럼 석패율제를 통한 부분적인 지역정당구도의 완화효과를 기대하더라도 석패율제는 민주당과 한나라당 양당만을 위한 일방적이고 불평등한 제도개편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일부에서 석패율제를 통해 의석변화가 없기 때문에 석패율제가 어느 누구에게 유리 혹은 불리한 제도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석패율제를 통해 지역정당구도의 완화한다는 것 자체가 양 지역정당만 제도적 변화를 기반으로 지지기반의 확대를 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민주당이나 한나라당 후보로서 영남 혹은 호남에서 겪는 어려움을 호소하지만 이는 군소정당 후보도 마찬가지이며, 대정당 후보라고 이를 보완해 주어야 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못함. 정당의 취약성 때문에 이를 보완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면, 동등하게 군소정당이 취약성을 극복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이나 이 역시 잘못된 것임은 자명)
즉 특정 정당의 지지기반이 취약하다고 석패율과 같은 제도로서 이를 보완해주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와 선거제도의 기본원칙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방식을 통해 이를 해결해야 한다.
한편 석패율제와 관련하여 흔히 지적되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석패율제가 중진 정치인들의 안전판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임.
이와 관련하여 석패율제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취약지역에서만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석패율제의 악용과 같은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최근 한나라당이 석패율제의 전국적 적용을 주장하는 것이나, 민주당의 중진 정치인일부가 영남지역으로 지역구를 옮겨 출마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석패율제의 도입이 어렵지 일단 도입되면 석패율제의 확대적용(영호남지역 적용에서 전국적용 등)은 쉬울 수밖에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석패율제의 악용 문제를 기우로만 여기기 어려움 있다.
또한 석패율제는 당선자의 정통성이라는 점에서 문제를 안고 있어,즉 지역구에서 낙선한 후보를 비례명부를 통해 ‘구제’한다는 것을 유권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영호남지역 적용만을 고려할 경우 석패율제를 통한 당선자의 낮은 득표율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당선자의 정통성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이나 독일에서도 중복공천이 활용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다는 주장이 있으나, 일본과 독일의 경험은 우리와 상이함.(일본의 경우 중선거구제에서, 그리고 독일의 경우 비례대표제에서 현 혼합제로 제도변화가 이루어졌지만, 한국의 경우 소선거구제 중심이기 때문에 중복공천의 의미가 상이할 수밖에 없다.)
석패율제의 도입과 관련하여 가장 주요하게 지적되어야 점은 선거제도의 개선이 땜질식 처방이 아니라 보다 원칙론적인 입장에서의 접근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즉 현행 소선거구제 중심의 선거제도가 갖는 주요한 문제점은 승자독식, 비비례성, 인물 중심의 선거, 사회적 대표성의 취약성 등과 문제이며, 선거제도의 개선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석패율제는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오히려 이러한 문제를 심화시킬 수 있다.
즉 석패율제는 비례제에도 지역대표성을 접목시키는 것으로 비례제 고유의 취지인 사회적 대표성을 약화시키고, 인물선거를 강화하는 등 사회적 대표성의 강화라는 선거제도의 개선방향에 전혀 부합하지 않으며, 비례제를 늘려야 하는 마당에 거꾸로 지역대표성을 강화하려는 개악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독일식 정당명부제 도입과 관련하여
현행 선거제도의 핵심적 문제 가운데 하나는 소선거구제 고유의 비비례성 문제이며, 지역투표로 인해 이러한 비비례성은 지역정당구도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음.(선거제도를 통해 지역정당구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표심의 왜곡’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하지 못함. 다만 소선거구제의 왜곡으로 인해 지역정당구도가 강화되는 부분은 시정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승자독식의 다수제적 선거제도로 정치적 갈등과 대립은 갈수록 극심해지고 있음.(물론 여기에는 대통령제도 한 몫을 하고 있지만 국회의원선거제도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음.) 뿐만 아니라 현행 단순다수제 중심의 선거제도에서도 다당제적 정당체계와 이에 따른 분할정부(여소야대)의 등장이 빈번하여 현 선거제도가 다수제 고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승자독식으로 인한 정치적 갈등으로 정부의 정책적 효율성만 훼손되고 있다.
또한 현행 선거제도의 장점으로 언급되는 지역주민과 대표자의 유대성 강화 역시 우리의 경우 국회의원이 지역주민을 정치적으로 대표한다기보다 ‘경조사 챙기기’ 등 비정치적 관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선심성 지역구 챙기기’ 등 왜곡된 형태의 일회적 지역대표 활동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현행 선거제도가 정치를 안정적으로 제도화시킬 수 있는 책임정책정당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한편 대표선출단위라는 측면에서 기능적 대표성의 원칙보다 지리적 대표성의 원칙을 중시하는 우리의 선거제도가 현 시대적․사회적 상황에 조응하는지도 검토해 볼 문제임. (선거제도의 채택원칙으로 정부의 안정성이라는 대표성의 원칙과 이에 따른 의석배분의 기술적 원칙으로 다수제를 채택하면서 동시에 지리적 대표성의 원칙을 채택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나, 후기산업사회로 이행한 현 시점에서 지리적 대표성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지방자치의 제도화를 또 다른 정치적 목표로 설정하고 있는 우리의 경우 이에 걸맞게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지리적 대표성보다 기능적 대표성의 원칙을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
결국 현행 선거제도의 개선이라는 관점에서 지역정당구도의 완화는 부차적인 문제이며, 오히려 중요한 것은 현행 선거제도의 승자독식, 비비례성, 인물 중심의 선거, 사회적 대표성의 취약성 등의 문제를 해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당투표에 비례하여 정당의 의석이 배분되는 독일식 정당명부제가 가장 바람직한 선거제도 개선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식 정당명부제는 현재 활용되고 있는 선거제도와 친화성(1인 2표제, 지역구 선거와 비례명부제의 활용 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제도변화의 충격이 크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독일식 선거제도는 비례제와 마찬가지로 정당득표율에 비례해 정당의석이 배분되기 때문에 비례성을 높일 수 있으며, 민심의 왜곡 없이 소선거구제로 인해 강화되는 지역정당구도 완화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다.
또한 독일식 선거제도에서는 정당투표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인물정치가 아닌 정당정치의 강화와 책임정치의 강화에도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다.
독일식 정당명부제의 도입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가장 큰 문제는 비례의석 정수 또는 의원정수 문제이다.
즉 독일식 선거제도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비례대표 의석의 확대가 불가피하며, 따라서 지역구 의석을 축소해야 한다.
그러나 선거구획정 과정에서 지역구를 유지하기 위해 비례대표를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적지 않다는 점을 고려할 때 지역구 축소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문제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일반적으로 지역구를 극소로 축소하고, 전체적으로 의원정수를 늘리는 방안이 제안되고 있다.
의원정수 확대가 국민적 정서에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있지만, 선거제도의 대폭적인 개편의 필요성과 함께 의원정수 문제가 논의될 경우 어렵지만 받아들여질 수도 있음.(가장 바람직한 것은 정치권이 자기이해를 버리고 지역구를 적정 규모를 축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식 선거제도의 도입과 관련하여 흔히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인 초과의석의 문제는 조정의석의 활용이나 의석배분과정에서의 교정 등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 이 문제를 크게 우려할 필요는 없다.
<토론문>
박상훈(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1) 제도 갈등, 문제를 보는 관점을 둘러싼 갈등이다.
- 선거제도 개혁을 둘러싼 논란은, 한국 정당체제의 문제를 무엇으로 보느냐를 둘러싼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 크게 보면, 지역주의(지역정당체제, 지역구도, 지역갈등 등) 때문이라는 주장 對 사회 갈등을 폭넓게 대표하고 있지 못한 보수적 양당체제 때문이라는 주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 전자의 주장은 중선거구제와 석패율제를 대안으로 말한다면 후자는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그간 토론자는 전자의 관점, 즉 지역주의 때문으로 문제를 보는 것이 왜 잘못인지, 그게 아니고 민주화이후 한국의 정당체제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이념적으로나 계층적으로 지나치게 협애한 정치적 대표의 범위에 있다고 말해왔어. ([만들어진 현실], [정치의 발견] 등)이다
- 이 입장에서 몇 가지 생각을 말해보고자 해.
2) 한국정치, 무엇이 문제인가
- 필자가 생각할 때 민주정치의 비밀은, ‘갈등의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갈등의 강도’를 약화시키는 데 있어. 예컨대 노사갈등이 기업 내 노사문제로 한정된다면 갈등의 범위는 최소화되는 것인데, 이 경우 갈등의 표출은 강렬해질 수밖에 없어. 극심한 기업별체제하에서 과도할 정도의 노동배제적 정책을 지속할 때, 약한 노조의 입장에서는 격렬한 대응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가 대표적인 사례. 그렇지 않고 노사 갈등이 유럽처럼 산별체제로 확대해 다뤄지거나, 집권을 두고 경쟁하는 정당들이 다루는 경제정책 내지 노동시장 정책의 문제로 확대되는 나라일수록 갈등의 강도는 약해져 더 높은 산업평화가 유지되곤 해. 사실 어떤 경제체제를 갖든 가장 크고 중요한 갈등은 노동문제라 할 수 있어. 노동문제가 정당체제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한 갈등의 범위는 넓어질 수가 없고, 그런 나라일수록 갈등은 평화적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 그렇다면 사회갈등과 정당정치가 어떻게 조응할 때 민주적 가치는 좋은 성취를 이룰 수 있게 될까? 110개 정도 되는 민주주의 국가들 가운데 빈곤 인구의 비율이 낮고, 계층 간 불평등 정도도 낮으며, 비정규직의 규모도 작은 나라는 어디일까? 투표율은 높고, 인권 및 자유화 지표도 좋으며, 소수자 및 이주민에 대한 권리 부여 정도도 높고, 여성 장관 비율이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 기대 수명은 높고, 불법 약물 복용, 10대 임신, 10대 자살, 저체중아 출산율, 정신 질환 발병률, 영양실조, 비만율이 낮은 나라는 어디일까? 후천적으로 계층 상승이 가능한 사회적 유동성이 높은 나라, 즉 기회의 평등이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 강력 범죄율과 재소자 비율이 낮은 안전한 나라는 어디일까?
- 국내에 소개되어 있는 리차드 윌킨슨이나 토니 주트, 토마스 케이건의 책이나, 데이비드 브래디, 아렌트 레이프하트 등의 조사 결과를 원용하면 1) 진보정당의 득표율이 높고 집권 기간이 긴 나라 2) 노동조합의 조직율과 교섭능력이 강한 나라 3) 비례대표제를 선택한 나라들의 성과가 좋다고 할 수 있어. 한마디로 말해 사회갈등을 정치적으로 대표함에 있어서 비례성이 높은 나라일수록, 그래서 노동을 배제하는 정도가 덜하고 오히려 노동의 시민권이 강한 나라일수록, 나아가 진보적인 정당들도 상당한 득표를 하고 집권의 전망도 있는 나라들이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 가능성이 높다는 것. 진보정당과 노동운동이 강한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이 대표적이라면, 그 반대 사례는 미국이나 최근의 일본에서 볼 수 있다.
- 이념적・계층적 대표의 범위가 충분히 넓은 사회일수록 그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들의 관심과 이익이 평등하게 고려될 수 있어. 진보 정당의 경쟁력이 낮아 집권의 가능성이 없는 민주주의를 보수독점적 정당체제라 할 수 있는데, 이럴 경우 그 사회의 하층이나 약자 집단의 이해는 대표되기 어려워. 현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조건 위에서 실천되고 있는데, 이때 그 사회의 민주적 성취는 노동이라고 하는 가장 중요한 생산자 집단의 이익과 열정이 기업 운영과 노사 관계, 나아가 정당체제의 차원에서 어느 정도 평등한 권리를 향유하느냐에 달려 있게 돼. 노동의 시민권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에 따라 그 나라 민주주의의 내용과 질은 크게 달라진다는 것. 이 점을 생각하지 않고 지금과 같은 정당체제 위에서 그저 정권만 교체되고 세력과 인물이 바뀐다고 사회가 좋아진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한가한 이야기 이다
- 우리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정당들의 체계, 즉 경쟁하는 정당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문제보다, 정당이라는 하나의 단위 안에서 사람을 교체하는 데 지나치게 관심이 많아. 하지만 기본적으로 정당은 특정의 이념과 당원, 지지자를 가진 자율적 결사체이다. 그들을 결집시키는 그러한 이념과 열정, 이해관계가 우선적으로 중요해. 따라서 그들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강한 리더 중심의 위계구조를 가질 수도 있고 집단지도체제를 가질 수도 있고 평당원 중심의 수평적 결정구조를 발전시킬 수도 있어. 정당체제는 달라. 민주주의라면 무조건 복수의 정당이 있어야 하고, 그들이 사회갈등의 다원적 구조에 상응해 넓은 대표성을 갖도록 이념적․계층적․대중적으로 넓게 포진해 있어야 해. 민주주의의 문제는 정당이라는 단위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당체제라고 하는 복수의 정당들이 사회를 얼마나 넓게 대표하는가에 있어. 민주주의가 갈등의 체계라고 한다면 갈등을 조직하는 정당들이 몇 개인지, 그들이 대표하는 사회갈등의 폭은 얼마나 넓은지, 정당들 사이의 이념적 거리는 어떤지 등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돼. 개방적이어야 하는 것은 정당이 아니라 정당체제이고, 기존 정당체제가 사회갈등을 대표하지 못하는 협애성을 갖고 있다면 새로운 정당이 만들어지고, 이들의 정당체제 진입이 용이해져야 하고 그래서 기존 정당들의 행위양식에 변화를 줄 수 있어야 한다.
- 1970년대 이후 불어 닥친 민주화 물결을 비교 연구한 연구자들이 발견한 것 가운데 흥미로운 게 하나 있는데, 그것은 민주화 이행 직후 최초에 치러지는 정초선거 대부분이, 과거 그 나라가 권위주의 체제로 넘어가기 직전 상황의 정당 대안들의 경합으로 치러진다는 사실. 권위주의와의 투쟁에서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의 역할이 컸고 그렇게 해서 민주화가 되었다하더라도, 민주주의 체제를 새롭게 건설하는 데 참여할 정치세력을 결정하는 정초선거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대부분 권위주의 이전의 정당 대안들이 주도하더라는 말 달리 말하면, 이들 나라에서 ‘정치의 시간(political time)’은 권위주의 시기 동안 멈춰 있었다는 것이고,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치의 시간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 이전의 과거 시간을 복원해 이어간다.
-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 1987년 12월 대선과 이듬 해 4월 총선에서 경쟁했던 4개의 대안은 사실상 유신체제로 전환되기 직전인 3공화국 시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어. 김종필 후보의 민주공화당은 1960년대에 기원을 둔 세력이고, 김영삼 후보의 통일민주당과 김대중 후보의 평화민주당 역시 1960년대 말 신민당 내에 있었던 ‘40대 기수론’의 두 경쟁 세력. 나머지 하나인 노태우 후보의 민정당 역시 유신체제를 이끈 공화당의 후신이라 할 수 있어. 따라서 우리의 경우 역시 민주화 이행기 정초선거를 지배한 것은, 학생운동도 아니고 노동운동도 아닌, 20년 이전의 정당 대안들이었어. 문제는 그 사이, 즉 1970-80년대의 권위주의 통치 기간 동안 우리 사회는 엄청나게 변했다는 데 있어. 독점적 영향력을 가진 재벌중심의 경제구조가 완성되었고 대기업 중심의 노동조합운동이 등장했으며 (경제․법․상비군이 중심이 되는) 국가관료 체제 역시 완성되었어. 게다가 1980년대 말의 세계적인 탈냉전의 충격과 1997년 IMF 사태를 정점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강력한 충격을 받았고, 그 결과 기존의 노동시장 구조 및 금융질서에서도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어. 갈등의 구조는 이렇듯 크게 변화했는데 이를 대변하고 조정해 가야할 정치의 구조는 1960년대 말의 정당들에 의해 주도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 사회적 갈등구조와 조응하지 못하는 낡은 정당정치는 많은 부작용과 혼란을 만들어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지역갈등이라 할 수 있어. 우리처럼 인종적․혈연적․종교적․문화적 차이가 적은 동질적 사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지역 간 투표행태의 차이가 매우 극단적으로 달리 나타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이 문제로부터 기인해. 즉 민주화 이후 정당 간 경쟁이 1970년대 이후 누적된 계층이나 이념적 갈등을 반영할 수 없는 구조의 문제를 빼고, 한국의 지역갈등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말. 민주화이후 갑작스럽게 한국의 선거를 지배하기 시작한 지역주의의 정치는, 사회갈등의 구조와 조응되지 못한 정당체제하에서 국가권력을 둘러싼 강렬한 선거투쟁이 전개되었을 때 유일하게 동원이 가능한 갈등이 무엇이었는가의 질문으로 접근되어야 해. 그래야만 지역갈등을 해결하는 합리적 접근은 지역 간 화해와 교류, 지역 간 의석 분배 규칙 변경, 지역감정 의식개혁과 같은 것에서가 아니라, 정당체제의 이념․계층적 기반을 넓히는 방향에서 찾아질 수 있게 될 것. 그리고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과제와 양립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 급격히 변해온 사회갈등의 구조와 낡은 정당체제 사이의 괴리 내지 부조응 속에서, 혹은 그런 부조응 때문에 만들어진 또 다른 문제는 정치 밖으로부터 해결자를 찾고자 하는 대중적 욕구를 끊임없이 확대시켰다는 점. 안철수 현상처럼 ‘무슨무슨 현상’이 일상화되고, 아무도 예기치 못했던 대규모 촛불집회가 터져 나오고, ‘희망버스운동’이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도 이런 정치와 사회갈등이 부조응하는 조건에서 가능했던 일. 투표율의 급격한 하락 역시 같은 원인에서 기인하는 현상이라 할 수 있어. 민주화이후 20년 동안 대선과 총선 모두 30% 안팎의 하락률을 보였는데,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 이렇게 빨리 투표율이 떨어진 사례는 없어. 한국처럼 선거일이 공휴일인 경우는 별로 없으며, 선거관리위원회 조직이 우리처럼 크고 많은 예산을 갖는 나라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투표율이 낮아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 투표율 하락의 계층적 편향성도 문제. 부자 동네의 투표율에 비해 가난한 동네의 투표율이 훨씬 낮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하층 시민이 평등한 시민권을 향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민주화이후 한국정치의 전형적 양상으로 자리잡은 이른바 ‘열망-실망의 사이클’도 마찬가지. 그것은 특정 국면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할 것처럼 변화의 에너지가 다양한 형태로 분출하지만 그 국면이 지나 먼지가 가라앉고 나면 기존의 구조나 체제는 바뀐 것 없이 건재하게 유지․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현상을 말해. 다음번 대선에서 민주당 중심의 야권후보가 집권한다고 해서 이 악순환이 종결될 수 있을까? 안철수 씨처럼 아웃사이더가 들어와 정부를 운영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어려울 것. 적어도 사회갈등과 부조응하는 정당체제의 구조가 달라지지 않는다.
3) 선거제도
- 이상의 관점에 서면 선거제도 개혁의 문제는 이념적, 계층적 대표의 범위를 넓히는 문제, 정당이 아니라 정당체제가 개방적이 되는 데 있어. 그렇다면 우리 사회 갈등의 구조 위에 서 있는 유권자의 다양한 선호를 비례적으로 정당 간 의석 분포로 나타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어야 하고, 결국 비례성이 높은 제도로 바꾸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그간 이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 다수의 동의를 얻은 것은 독일식 정당명부제. 현 민주당의 원래 당론도 같았어. 그러다가 노무현 정부 때 지역주의 극복을 말하며 중(대)선거구제와 석패율제도 사실상 당론이 되었어. 토론자가 알고 있는 한, 민주당의 당론은 분명하게 논의되거나 결정된 바 없이 어느 순간 슬그머니 중대선거구제와 석패율제로 바뀌고 있다.
- 석패율제의 문제점, 그리고 독일식 정당명부제에 대해선 김영태교수의 발표에 전적으로 공감. 덧붙일 것이 없을 만큼 다양한 측면에서 문제를 살펴보았다고 생각해. 특히 석패율제가 지역주의 극복에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지역구도의 문제를 완화한다는 관점에서도 독일식 정당명부제가 우월한 대안이라는 지적에 동의했다.
- 덧붙인다면 중(대)선구구제도 동일한 문제 지적할 수 있다는 점.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단순다수제에서 선거구 크기를 늘리면 비례성이 낮아져. 단순다수제를 하는 한 소선거구제가 가장 비례성이 높다는 말. 물론 사표는 줄어, 사표는 줄지만 비례성도 동시에 낮아진다는 점, 이를 이해하는 게 중요해. 소선거구제는 제2당에서 이득이 큰 반면, 중(대)선거구제는 제1당이 이득이 크기 때문. 중(대)선거구제에서는 지역당의 등장이 훨씬 용이하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어. 특정 지역에 강한 기반을 가진 인물이나 세력의 경우에겐 정당 진입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지금과는 종류가 다른 진짜 지역정당이 등장할 가능성 높이는 측면도 있다는 점 생각해야. 지금이야 민주당이 2당이니까 그렇지 다수당이 되면 또다시 중(대)선구구제 말하게 될 것. 그때에도 같은 관점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 결론적으로 말해, 지역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사회갈등과 부조응하는 대표체제가 문제이고 그걸 변화시키려면 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이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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