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은 「과연 군대는 우리나라 젊은 남자를 어떻게 변하게 할지」에 관해 최근 두 달 동안 20代 남성 240명을 대상으로 하여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경험과학적 연구방법으로 다양한 심리검사를 벌였다고 한다. 그 결과 군대생활이 이들을 더욱 보수적으로 만들고 가 부장적인 사고방식을 강화하는 데 영향을 주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지난 11월1일부터 닷새 동안 연재된 「탐사기획·병영과 한국남자 심리학 보고서」는 「1. 나는 이렇게 바뀌었다」로 시작하여 「2. 고립된 성의식」「3. 외국의 병영문화」「4. 전문가 좌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체로 우리 軍에 대하여 부정적인 내용이 主流를 이루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軍은 보수적·가부장적·강압적(非민주적)·남성우월적 문화(기풍)가 지배하고 있어 군대생활하는 젊은이들이 그렇게 변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한겨레신문의 이러한 기사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보도의 저의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그 기사의 내용 중 우선 지적해야 할 부분은 「후임병에 대한 선임병의 가혹행위를 비롯한 한국軍의 병폐(강압적 분위기-필자 注)는 대부분 일본 제국주의 시절의 일본軍(舊일본軍)에서 온 것이다. 광복 이후 군대를 편성(창군)하면서 자발적 애국심과 상호존중의 전통을 가진 광복군이 아니라 고압적인 군대문화를 가진 옛 일본軍 출신들이 주축이 됐기 때문」이라는 견해다.
틀린 말이다. 이는 그 당시의 事實(사실) 내지 우리의 역사를 잘 알고 있지 못한 데 기인한 것 같다. 물론 광복 후 우리 軍을 건설할 때 舊일본軍과 만주軍 경력자들이 간부층의 주축을 이루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당시 광복군 출신의 수가 너무 적었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舊일본군에 엄격한 上命下服(상명하복)의 기풍이 매우 강한 가운데 (선임병이 후임병을 괴롭히는) 이른바 「이지메」가 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군대문화 속에서 생활한 舊일본軍 경력자들이 우리 軍의 건군(창군)에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 軍에 후임병에 대한 선임병의 가혹행위를 비롯한 병폐가 옮아 왔다고 보는 견해는 한낱 推論(추론)일 뿐이다.
옛날 일본에 있었던 「이지메」라고 알려진 이 惡習(악습)은 「우리의 옛날」에도 있었던 것이다. 우리 국군의 創軍(창군) 원로들 중 대다수가 舊일본軍에서 군대생활을 해야 했던 시기는 대체로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1941년 12월8일 이후부터 그 전쟁이 끝난 1945년 8월15일까지다.
조선시대의 新來侵虐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이미 그보다 훨씬 전인 조선왕조 때 그런 惡習이 보편화해 있었다. 사회 구석구석에까지.
그 당시 근엄했던 조선 유교사회에서의 「새디즘的」 惡習은 免新禮(면신례) 또는 許參禮(허참례) 내지 新來侵虐(신래침학)으로 광범위하게 나타났는데, 말할 수 없이 잔혹했다.
예를 들면 혼례날 저녁 신부집에 온 신랑을 그 마을 남정네들이 신부집 대들보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갖은 음탕한 말을 해가며 막대기로 신랑의 발바닥 내리치기를 계속한다. 간혹 신랑이 그 고통을 이겨 내지 못하고 죽는 사건도 있었다. 이 경우 그의 신부를 同繩寡婦(동승과부)라 했다. 한 집안에 시집 온 새댁에 대한 시누이나 동서들의 괴롭힘도 만만치 않았다.
이러한 新來侵虐은 그 형태나 방법을 달리하여 사회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었다. 무당과 기생 사회에서의 그것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감옥·병영·관청 등에서는 물론 가장 점잖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成均館(성균관), 藝文館(예문관), 承文院(승문원), 校書館(교서관)에서도 그러했다. 高官인 堂上官(당상관)들에게서도 그 예외가 없었다.
이러한 惡習은 낯 뜨거울 정도로 음탕하고 잔인하여 新參(신참)들의 자존심과 인격을 견딜 수 없을 만큼 짓밟아 일부 재능 있는 관리들이 관직에의 부임을 거부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것은 왕조실록의 기록이다.
李栗谷(이율곡)은 과거에 급제하여 承文院에 발령받았으나, 이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낙향하며 宣祖(선조) 임금께 이러한 폐습을 없애야 한다고 疏(소)를 올린 바 있었다.
이렇게 옛날부터 (자기보다) 약한 자를 괴롭히는 惡習들이 우리의 집단 무의식 속에 살아 있어 오늘날 군대·경찰(전경)·학교를 비롯한 우리 사회 곳곳에 잔존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史實(사실)을 외면한 채 군대內의 이러한 악습들을 간단히 舊일본軍의 잔재로 치부하여 舊일본軍 출신의 創軍 元老들을 탓하는 것은 옳지도 않고 저널리즘의 正道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병폐의 원인을 軍에서 찾는 것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嫌軍(혐군) 캠페인에 불과하다.
무얼 위해 創軍 원로들을 매도하나?
우리 국군의 초창기를 이끌던 元老들이 당시 젊은 나이에 미처 軍의 지휘체제나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건국 1년 10개월 만에 북한의 6·25기습 남침을 당한 위기에서 유엔軍과 힘을 합쳐 악전고투 끝에 나라를 지켜 냈다.
이들의 조국애와 열정적 헌신이 없었더라면, 그때 신생 대한민국은 망하여 全 한반도가 공산화되고 金日成-金正日로 이어진 최악의 독재下에서 우리 국민은 지금 북한 주민들처럼 처참한 삶을 이어가고 있을 터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많은 軍원로들이 舊일본軍 경력이 있었거나 日帝下에서 훈련을 받았다 하여 「국군에 들어오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로 치부한다면 이 보다 더한 배은망덕이 어디 있겠는가.
기사에서, 일본에서는 自衛隊(자위대) 창설時 舊일본軍 경력자들을 배제하여 과거와의 단절로 舊질서를 청산, 자위대를 민주화했다고 부러운 듯이 강조하는 대목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싶은 것인가?
다시 강조하건데 우리나라가 6·25를 극복하고 全세계 사람들이 찬탄하는, 이만한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은 우리 국군의 創軍 원로들과 6·25 참전 노병들의 헌신의 토대 위에서 가능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우리 사회의 親北·左翼 세력들은 6·25 때 우리가 金日成의 남침을 막아 내서 이 나라가 공산화되지 않은 것을 무척 아쉬워하고 있다. 우리의 6·25 참전용사들과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그 당시 참전국 군인들을 무척이나 미워하는 이유가 그런 데 있을 것이다.
이들이 우리 군인들을 아무리 부추겨도 舊일본軍 출신 원로들과 후배들 사이에 괄목할 만한 틈이 생기거나 편가르기로 서로를 삿대질하는 불행한 일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좌익들이 만들어 낸 「편 가르기」와 그 폐해를 잘 알고 있다.
군대생활로 인해 남성우월의식이 강해진다?
또 한겨레 신문기사에서, 군대생활 중 끊임없이 주입되는 「남성우월주의」로 여성을 낮춰 보는 의식을 낳게 한다고 했다. 즉 非민주주의적 남녀차별을 말하는 것 같은데, 우리 인류는 선·후진사회를 막론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직도 완전한 남녀평등은 이루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민주주의 선진국 사회일수록 여성의 인격과 권익의 손상이 없도록 남녀평등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해왔다.
그러나 역시 시간을 요한다. 민주주의로의 이행에 700년이나 노력해 온 영국도 여성이 선거에서 남성과 동등한 투표권을 갖게 된 것은 우리보다 불과 20년 앞선 1928년이었고, 200여 년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미국이 우리보다 28년 앞선 1920년이었으며, 프랑스가 우리보다 4년 앞선 1944년이었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매우 일천한 우리나라는 1948년 5·10 선거로 제헌의원을 선출할 때부터 남녀가 동등하게 투표권을 행사한 이래 반세기 동안에 다른 나라에 비하여 매우 빠른 속도로 女權이 신장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아직도 女權신장을 위해서 갈 길은 멀다. 시간을 요한다는 뜻이다.
유독 군대생활로 인하여 가부장적이고 남성우월의식이 강해진다고 하는 논리는 지나친 牽强附會(견강부회)다.
이 신문사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경험과학적 연구방법」을 통한 조사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그 조사 대상이 겨우 20代 남성 240명을 母集團(모집단)으로 하지 않았던가? 미흡하다. 그 몇 배의 인원을 대상으로 했어야 그 신뢰도가 더 높았을 것을.
군대는 집단 살인을 준비하는 조직이다
기사는 「군대의 민주화」를 강조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군대문화도 일본·독일·스위스·네덜란드 같은 나라의 그것을 소개했다. 일본 自衛隊 방위대학교에서 교장이 국가에 대한 충성보다 인간성 함양을 더 강조하고 신사가 될 것을 당부했다든가, 自衛隊에 개인의 자유와 인권존중 의식이 뿌리 내리고 「자위대 조직문화가 일반 회사와 그다지 차이가 없다」는 말도 빼놓지 않고 소개했다.
참 좋은 (군대)문화다. 모름지기 인간이 발붙이고 있는 곳은 그래야 한다. 그런데 이 나라들의 경우 모두가 우리나라와는 그 안보 환경(여건)이 매우 다르다는 점을 알면서 그런 소개를 했는지 의문이다.
사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군대를 아예 갖지 않는 것이다. 군대와 경찰이 필요 없는 세상, 이것은 우리 인류역사에서 오래 전부터 여러 성현들이 추구하던 理想(이상)이 아니었던가.
군대는 必要惡(필요악)이다. 군대가 궁극적으로 할 일이 무엇인가. 전쟁(전투)이다. 전쟁은 패가 다른 인간들이 서로 맞서 집단 살인하는 作業(작업), 잔인하게 죽이고 죽는 작업이다. 이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야만이요 非인간이다. 모든 군대는 평시부터 이런 전쟁에 대비(준비)한다.
그 중요한 준비과정으로 훈련을 하는데 이는 (집단) 살인연습이고, 이를 지시(명령)하는 「높은 분들」은 살인교사범들인 셈이다. 군대야말로 있어서는 안 될 조직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인간 조직체가 군대다. 군대의 역사는 유구하여 인류의 역사와 같이한다. 군대 없는 나라는 없다. 이 나라들은 역사의 발전과 함께 인간(국민)의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해 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나라들, 민주주의 국가들에도 군대에만은 민주주의가 없다. 그리고 전장에서는 휴머니즘도 인권도 자유도 없다. 전쟁에 이겨 살아남기 위해서다.
현대사에서 군대도 민주화하고 자유·평등·인권의 꽃이 피며, 모든 군인이 평등하도록 계급제도마저 없애 버리는 「실험」도 해봤다.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후의 소련 「붉은 군대」 이야기다. 그러나 18년 후인 1935년에 정식으로 계급제도를 부활시켰다. 그렇게도 계급타파를 주장하던 공산주의자들이 동작이 느린 中國은 여러 차례의 우여곡절 끝에 1988년 8월1일에야 군대에 계급제도를 도입했다.
결국 「군대는 군대다워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교훈을 확인해 준 셈이다. 어떤 것이 군대다운 군대인가.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는, 즉 전쟁에서 이기는 군대이다. 이러한 군대를 만들기 위하여 군대에는 민주주의도 선거(선출직)도 없고, 자유·평등·인권도 상당부분 유보되는 것이다.
군사력이 강한 쪽이 통일을 이룬다
현대사의 이념형 분단국가들 중 이미 再통일한 3개국(베트남·예멘·독일)의 경우 군대가 강한 쪽이 상대를 흡수통일했다.
1975년 남북 평화협정을 유린하고 기습 남침한 北베트남의 武力(무력)통일, 1993년에 남·북 총선거를 거쳐 평화통일로 시작하여 결국 다음해에 쌍방 무력 투쟁 결과 北예멘의 승리로 흡수통일을 이룬 예멘의 통일이 그러했다.
1990년 평화적으로 동독을 흡수한 서독의 독일 통일의 경우 서독 군사력이 동독 인민군보다 3대 1로 우세하여 동독 인민군이 그들에게 불리한 조건들을 저항 없이 받아들여 서독軍의 不戰勝(부전승)으로 평화통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이야 말로 지금과 같은 남북 분단·대치 상황下의 우리에게 군대의 중요성을 웅변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군사전문가들과 많은 지식인들 그리고 국민 일반이, 개혁과 과학화를 명분으로 내세워 우리 軍병력을 일방적으로 감축하는 것과 軍사법제도개혁이란 이름으로 軍지휘관들의 지휘권을 약화시키려는 것을 우려하고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親北·左翼 세력들의 교묘한 국군 약화 시도 및 韓美동맹 약화 내지 파괴공작에 우리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으며, 특히 언론을 주목한다. 언론의 역할·기능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지적하고자 한다. 젊은이들이 軍 병영생활을 통하여 보수적·가부장적 의식을 갖게 되고, 국가 우선적 사고를 하며 순응적으로 변하는 것을 기사에서 못마땅해하는 것 같다. 필자의 생각은 이와 달리 오히려 그런 변화가 좋게 느껴졌다.
매슬로가 말한 인간의 욕구 6단계 說에 따르면 인간이 살아가면서 안전과 안정을 희구하는 것은 1단계 욕구인 食慾(식욕), 性慾(성욕), 휴식(수면)욕 다음으로 강렬한 욕구이다. 그러한 (안전·안정) 욕구의 충족을 위하여 인간은 자연히 보수화되고 순응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軍은 혁명가 양성소가 아니다
그러나 다른 성향의 사람들도 있다. 더 나은 삶, 즉 발전을 위해서는 보수적 가치체계를 부정하고 현실을 타파하여 빨리 전진해야 한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진보적·혁명적인 사람들로서 이를 위한 투쟁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듯이 매일 투쟁이나 하고 기존의 것들을 뒤엎어 버리면 혼란이 와서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그 사회는 발전하지 못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혁명투사들이 잠깐 생각해 보고 타파하겠다는 法과 제도들이 실은 오랜 세월을 두고 시행착오도 겪으며 여러 차례 생각하고 수정을 거쳐 오늘에도 존속할 가치가 있어 존재하는 것들임을 알아야 한다.
軍 병영생활을 통하여 젊은이들이 보수화된다면 이는 좋은 일이고, 軍이 건전하다는 것을 뜻한다. 軍은 혁명가 양성소가 아니다. 좌익들에게는 유감스럽겠지만.
간곡히 당부한다, 제발 軍을 그냥 좀 놔두라고. 軍도 强軍이 되기 위하여 스스로 노력하고 있다. 그러니 좋은 결실이 있을 때까지 담담하게 기다려 주는 것이 軍을 돕는 길이기도 하다. 어디 한번 軍을 믿고 기다려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