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자주평화 통일에 바친 민족의 지도자이자 겨레의 큰 스승”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백범 김구 선생을 기리는 ‘백범 김구선생 65주기 추모식’이 26일 오전 용산구 효창동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회장 김신)주관으로 열렸다.
이날 추모식은 이만섭정 前 국회의장, 정의화 국회의장,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을 비롯해 독립유공단체장, 광복회원, 시민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신 기념사업협회장의 식사(式辭), 정의화 국회의장·박승춘 국가보훈처장·박유철 광복회장의 추모사, 숙명여대 합창단의 추모가(追慕歌), 헌화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 26일 오전 용산구 효창동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주관으로 ~‘백범 김구 선생 65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konas.net
정의화 국회의장과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추념사를 통해 김구 선생을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자주평화 통일에 바친 민족의 지도자이자 겨레의 큰 스승”이라며 선생의 민족정신을 이어 조국의 소원인 통일을 이룩해 나가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을 밝혔다.
전국 곳곳에서도 백범 선생을 추모하는 다양한 행사가 개최되었는데 이날 오전 인천대공원 백범광장에서는 광복회 인천광역시지부(지부장 임병호) 주관으로 박노진 인천보훈지청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광복회원, 시민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또 대전·충청지역에서는 금년 처음으로 백범선생 추모제가 개최되었는데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에서도 오전 10시부터 ‘백범 김구선생 65주기 추모 다례재와 사진·휘호 전시회’를 개최했다.
마곡사는 김구 선생이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를 위해 일본 육군중위 스치다를 처단하고 체포되어 인천감리서에 투옥됐다 탈옥하여 은둔하며 승려 생활을 하였던 곳이다.
다음은 백범 김구 선생의 약전(略傳) 임.(Konas)
백범 김구 선생의 약전(略傳)
▸ 1876년 황해도 해주 출생
▸ 1893년 동학에 입도. 1894년 팔봉접주(八峯接主)로 임명. 황해도에서 동학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 공격. 동학농민운동 가담 후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머물면서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에게 유학을 배웠으며, 만주지역을 시찰하다 의병활동에 가담
▸ 1896년 치하포에서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를 위해 일본 육군중위 스치다를 처단하고 체포되어 인천감리서에 투옥. 옥중에서 신서적을 읽고 개화사상을 키웠으며 탈옥 후 승려 생활을 하기도 했음
▸ 1899년 환속한 후에는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신교육 운동에 노력함
▸ 1905년에는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 전개
▸ 1907년에는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비밀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 황해도 총감으로 활동하다가 안악사건·105인 사건 등으로 수감
▸ 1915년 출옥한 후에는 동산평농장의 농감생활을 하며 농민계몽운동 전개
▸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 임시정부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 등을 역임하면서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도 임시정부를 지키고 활성화시키기 위해 진력
▸ 1931년 ‘한인애국단’ 조직.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일으켜 내외에 큰 영향 끼침. 한인청년들을 중국관학교에 입학시켜 군사훈련을 받게 하는 등 다가올 독립전쟁에 대비
▸ 1940년 임시정부 주석으로 ‘한국광복군’ 조직 군사활동 전개. 독립운동 세력 통합. 연합국으로부터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는 등 항일운동의 최선봉에서 조국독립 위해 투쟁
▸ 1945년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결정된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 반대’ 및 ‘반탁 운동’ 전개
▸ 1948년 남북한의 통일정부 수립 위한 남북협상 제의. 평양에서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개최
▸ 1949년 6월26일 친일·반통일 세력에 의해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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