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법철 스님
임진난(壬辰亂)의 구국의 승장(僧將), 사명대사는 일본의 새로운 위정자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만나러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 조정에서 서양의 천주교 신부를 처음 만났다. 사명대사와 그 신부는 서로의 종교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를 존중하는 아름다운 만남이었다. 두 사람이 헤어질 때 사명대사는 신부에게 자신의 염주를 신표로 주었고, 신부는 자신의 은제 십자가를 신표로 건네주었다. 사명대사는 귀국길에 십자가를 소중히 가져왔다.
사명대사는 귀국하여 임금에게 귀국 보고를 마치고, 묘향산에 주석하고 있는 스승인 서산대사를 찾았다. 사명대사는 귀국 보고를 드리면서 은제 십자가를 내놓고 신부에게 들은 천주교에 대해 보고를 드렸다. 서산대사는 십자가를 들어 살피며 신기한듯 보며 천주교의 교리를 들었다고 한다. 십자가를 호의적으로 보는 서산대사에게 사명대사는 십자가를 선물했다. 서산대사는 십자가를 소중히 간직했다.
서산대사의 법명은 청허이다. 일생을 거의 묘향산에 주석하며 수행과 전법과 불교의 호국사상을 실천하였다. 따라서 묘향산이 서쪽에 있기 때문에 일명 서산대사로도 불리웠다. 서산대사가 임종 즈음하여 묘향산을 집착하는 생각을 바꿨다. 어느 날, 상좌들에게 자신이 입적하면 자신이 평소에 간직한 유품들을 모두 해남 대흥사로 운반하여 보관하도록 엄명했다. 대흥사는 병화(兵禍)가 침입하지 않는 길지(吉地)이니 그곳에 자신의 유품일체를 보관하라는 것이다.
임진난 때 서산대사는 선조로부터 팔도도총섭(八道都總攝)지위로 존중받았으니 그 명령은 일사천리격이었다. 서산대사의 유품이 보관돼는 대흥사에 임금은 대흥사 변두리에 서산대사의 제향을 받드는 표충사(表忠祀)를 지어 주었다.
서산대사의 표충사는 해남 대흥사에 있고, 사명대사의 표충사는 사명대사의 고향 밀양에 있다. 서산대사의 표충사에는 해마다 제향을 받드는 날이면 사부대중은 물론, 해남군수를 비롯해서 각 기관장, 인근의 시장군수와 목포 해역사의 장성까지 참여하여 서산대사의 호국사상을 기린다.
1971년 봄, 나는 지금의 해인승가대 11회의 졸업장을 받자마자 지금은 입적하셨지만, 임기산(林基山)선사가 대흥사(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소재의 조계종 본사 대흥사)주지직을 맡았으니 도와 달라는 연락이 와서 난생 처음 대흥사를 찾았다. 걸망을 풀고나서 나는 곧바로 대흥사의 보물장(寶物藏)을 구경했다. 고찰의 본사마다 보물장이 있다. 그 사찰에서 전해오는 보물이 있는 것이다.
대부분 서산대사의 유품이 많이 진열되어 있는 대흥사 보물장은 50대 중반의 처사 한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그는 표충사의 구석방에서 기거하며 표충사와 보물장을 지키면서 관람객들에게 유창하게 설명을 했고, 결론은 자신이 구석방에서 업드려 쓴 부적같은 붓글씨를 보여주며 소지하면 액운이 물러가고 재수가 있다면서 판매하여 수입을 잡고 있다. 그의 약점은 마누라를 너무 사랑한다는 것이다. 가끔씩 맛있는 음식을 들고 찾아오는 마누라가 올 때면 처사는 방안에서 마누라와 회포를 푸는 건지, 자녀들 걱정을 하는건지 보물장을 지키는데 게을리 했다. 내가 보물장을 찾은 그날도 처사는 보물장을 지키지 않았다.
나는 텅 빈 보물장을 구경하는 내내 도적걱정을 했다. 그 날, 나는 최초로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가져왔다는 설명이 붙은 십자가를 보았다. 십자가는 족히 20cm는 되어 보였다. 나는 그 십자가를 집어들어 응시하며 사명대사와 서산대사를 간절히 생각했다.
수십년이 흐른 오늘에도 그 날, 대흥사 보물장에 방치되디시피한 보물을 기억한다. 십자가와 다도에 대해서 쓴 초의스님의 친필이 많았다. 초의스님은 그 당시에 명문장가인 것 같았다. 세필(細筆) 친필의 한문 문집이 몇 권 있었고, 20cm 정도의 입상의 금불상, 비스듬히 앉아있는 화관을 금동 관음보살상은 얼핏 보아도 소중히 간직해야 할 보물이었다.
삽화(揷話)로 사명대사의 이야기를 새로운 독자를 위해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조선침략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새로운 실권자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등장했다. 일본조정은 조선과 화친하기를 위협적으로 강요해왔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일본이 두려워 사신으로 나가려는 정치인이 없었다. 선조 37년 6월에서야 조정은 사명대사를 통신사(通信使)라기 보다는 불교적의미를 부여하여 널리 일본을 제도(普濟扶桑)한다는 취지에서 일본에 파견하는 한심한 외교적 작태를 부렸다.
일본의 조정은 물론, 승려들, 귀족, 평민들까지 사명대사의 시문(詩文)을 얻으려고 앞다투었다. 이에야스의 장자 히데야스(당시 32세)는 사명대사에게 선학(禪學)을 묻고 스승으로 예우를 하였다. 사명대사는 혁혁한 외교성과와 함께 귀국길에 일본군에 강제 끌려간 포로 3천6백여명을 데리고 귀환했다. 조선의 조정과 백성들은 놀라고 감탄했다.
사명대사는 해인사 홍제암에서 입적했다. 입적하기 전 사부대중을 불러 마지막 말씀을 이렇게 했다고 한다. “지,수,화,풍(地,水,火,風) 네가지 요소로 된 이 몸은 이제 진(眞)으로 돌아가려 한다. 무엇하러 번거로이 오가면서 이 허깨비의 몸을 괴롭히겠는가. 나는 죽음에 들어 큰 조화에 순응하려 한다.”하고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깨끗이 가사장삼을 입고 정좌하여 고요히 입적하니 세수 67세였다.
사주팔자의 지지(地支)에 인신해(寅申亥)로 역마살(驛馬煞)이 많아서인지, 나는 예나 지금이나 행운유수(行雲流水)처럼 떠돌아 다니기를 좋아한다. 수십년만에 대흥사를 찾았다. 산천은 의구(依舊)한데 인걸(人傑)은 간데없다는 말처럼 예전에 알고지냈던 승려와 처사들은 이미 한 줌의 재로 화하여 산천에 뿌려졌거나 사라져 볼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제행무상으로 낙루(落淚)하면서 표충사를 찾아 세 분 조사(祖師)인 서산, 사명, 뇌묵 스님의 진영앞의 향로에 향을 피우고, 삼배를 마치고 진영을 우러르니 아니! 예전 조사들의 진영이 아니다. 최근에 급조된 실력부족한 화공의 그림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확인해보니 어느 날 밤, 도적이 표충사의 세 분진영들을 모조리 훔쳐가 버렸다는 것이다.
보물장을 찾으니 초의스님의 친필 문집과 입상의 금불상, 화관을 쓴 관음상도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또한 그 십자가도 사라져 버렸다. 마누라를 지극지성으로 사랑하여 표충사와 보물장을 돌보지 않더니 걱정 하던대로 도씨(盜氏)가 모두 훔쳐가 버린 것이다. 잃어버린 보물들을 애통하게 생각하면서 십자가는 한국 천주교로 돌아갔으면 은근히 바랬다. 도적이 회개하여 십자가는 천주교에 돌려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명대사의 손을 통해 온 십자가는 한국천주교의 보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낙심하여 숲길을 걸어 대흥사를 떠나오는데 숲속에서 낯익은 노승이 반가움을 표하며 다가왔다. 나는 그에게 따지듯이 대흥사 사라진 보물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는 표충사와 보물장을 지키던 처사를 원망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대흥사의 보물장은 현대식으로 잘 지어졌으니 도적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쳐서 뭘하게? 나는 그에게서 사라진 십자가에 대한 소식을 정확히 들었다. 어느 도적이 은제 십자가를 훔쳐 화력좋은 불로 녹여서 은값으로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승려는 욕설을 해서는 안되는데, 그날 나는 허공에 대고 욕설을 퍼붓고 말았다. "천하에 무식한 자 같으니! 그 십자가를 녹여서 은값으로 팔다니!" 그렇게 해서 사명대사의 손을 통해 우리나라에 온 최초의 은제 십자가는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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