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정 인(소설가)
산사(山寺)의 겨울바람은 쩡쩡하고도 청량했다.
수백년을 지탱해 온 고찰(古刹)의 어디선가 이른 군불을 때는지 정겨운 연기 냄세가 싸아하게 스쳐간다.
아- ! 순간 우리는 놀라 멈칫 발걸음을 멈추었다. 회주스님의 거처, 그 높고 넓은 댓돌 한 끝에 부드러운 고동색의 사자 한 마리가 비스듬히 앉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니 저 멀리 하늘을 보고 있었던가?
“<황태자>예요”
우리를 안내해 온 연극연출가 한선생이 웃으며 말했다.
사자가 아니라 중국산 개라고 했다. <티벳탄 마스티프>견종인 <짱아오>? 혹은 사자개로 불리운다는 <차우차우> 일거라고.
중국황실에서 기르던 휘귀한 품종이고 아마 몇쳔만원은 가는 엄청나게 비싼 종류라고 했다. 이곳 회주스님에게 중국의 누군가가 선물한 모양이다.
중국공산당 문화대혁명때 이 황실 개 역시 치욕스런 수난을 받아 거의 멸종되다시피했다가 겨우 몇 년전부터 다시 귀하게 대접받게 되었지만 아직은 그리 많이 번식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몸통은 약간 더 짙은 고동색이고 얼굴 주변에 난 갈퀴는 훨씬 부드러운 갈색으로 영낙없는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낯선 사람들이 다가가고 보고 있는데도 약간은 옆으로 앉아 얼굴을 하늘이나 숲쪽으로 돌린 자세 그대로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었다.
사자와 같은 위엄이 그의 부드러운 갈색의 털에, 그윽한 눈길에 그리고 침묵에 베어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수천리 떠나 온 먼 하늘을 향한 고향에의 그리움이 그 침묵 속에, 눈동자에 절절히 베어 있는것도 같았다.
큰스님의 차실(茶室)은 깊은 산 속에 떠 있는 한척의 범선(帆船)과도 같았다. 밖에서는 벽이고 문이었는데 차실안에 들어서자 벽은 간데 없고 밖의 산과 수목과 건물과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사방으로 다 보이는 유리처럼 되어 있었다.
박여사는 보자기를 풀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이 특별한 다회(茶會)를 위해 손수 만들어 두었던 송화다식등 갖가지 다식(茶食)을 한상자나 준비 해 넣었다.
박여사부부는 심신이 지쳐 대구로 내려갔던 나를 위해 큰스님을 만나서 다회(茶會)를 열어 주겠다고 했다. 대구로 출타 중이었던 큰스님께 스님과 가장 가까운 연극 연출가를 시켜서 급히 산사로 돌아 오시게 연락을 취했다.
오늘의 다회의 참석자는 박여사부부와 연극연출가 , 마침 우리처럼 회주스님을 만나러 그 산사로 온 여성화가와 회주 큰스님, 그리고 나, 그렇게 모두 여섯명이었다
회주스님은 당연히 불교이고, 나는 거의 기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살지만 그러나 아직 종교가 없고, 처음 본 여류화가는 잘 모르겠고,
박여사부부는 천주교 신자였다. 마침 일요일이라 바로 오전에는 나를 다른 곳에 쉬게 하고 이들 부부는 성당의 미사에 참석했다.
뿐만 아니라 연극연출가는 약간 진보적 성향이고 나는 보수적이고,박여사부부는 중도 비슷하고 식으로 전혀 다른 종교와 이념과 정치적 의견이 각각인 사람들이라 할 수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아주 우연히, 아니 어쩌면 전혀 우연이 아닌 영겁속의 어느 한조각 인연으로, 필연적인 우연으로 이 겨울의 늦은 오후에 정적에 쌓인 산사의 다실에 둘러 앉아 다회를 시작하려 하고 있는것이다.
박여사는 국제 다도회를 주관하기도 하는 다도의 전문가라고 할 수있다.
박여사가 송화다식과 차가 들어있는 보자기를 풀었다.
도자기 그릇에 다식을 담고 과일을 깍아 담고 그리고 볼때마다 경탄을 자아내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연꽃 봉오리를 꺼냈다.
박여사가 나를 위해 약속을 잊지않고 어느새 가장 아끼는 연화차를 준비한 것이다.
어느날 전화통화에서 TV화면으로 본 연화차의 신비함에 매료되었다고 했더니 박여사는 내가 대구에 내려가면 꼭 연화차를 대접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고도 거의 몇 개월이나 서로 바빠서 잊어 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겨우 사흘간의 귀향(歸鄕)을 감행했던 것이다.
아직도 잘 믿어지지 않지만, 어느날 무엇에 홀린 듯 대통령 예비후보로 추대되어 한달정도를 정신없이 전국을 돌았다.
의외로 천이백만 회원의 유림(儒林)이나 불교신도연합회등등과 체육 운동쪽과 문화예술관계 쪽 등 지지를 해 주겠다는 곳이 많았었다. 그 한달 동안에 나는 한 생애를 집약해서 단번에 필름을 다 돌려 본듯한 나의 삶의 또다른 특별한 부분을 아주 짧은 시간에 다 겪어내고 경험한 듯 했다.
동작동 국립묘지의 현충탑 참배때 삼군의장대가 늘어선 사이를 의전관의 에스코트를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뒤에 거느리고 걸어가는 그 지극히 찰나적인 순간에, 사람들이 왜 권력을 향해서 그렇게 무한질주하는가도 나름대로 깨달았다. 어이없는 배신도 당하고, 그에 대한 허탈함도 철저히 경험했고, 분노를 삭일줄도 알게 되었고, 본 등록이라는 시기에 허망한 미혹에 넘어가지 않고 스스로의 오만을 자제하는 절제도 해 내었다.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분명 어느시기동안 허탈하고도 피곤했지만 지금은 더없이 편안하고 초연하다. 왜냐하면 왜 내가 그런일을 이 생애의 그 순간에 겪어야 했는가의 이유를 나름대로는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생애에서 치러내야하는 어떤 부분이 있다는건 약간은 불교적 해석일 수도 있다. 일종의 업이다.
초연(超然)했지만, 그러나 심신이 솜처럼 피로에 젖어 어느날 불연듯 고향을 찾았던 것이다. 평소처럼 떠들썩하게 하고싶지 않았다.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어쩌면 낯설어 서먹 할 수도 있는 박여사부부를 찾았다. 그리고 이들 부부가 나를 위해 송화다식을 준비하고 다기를 싸들고 다회를 하러 대구 근교의 이곳에 들린 것이다.
때로는 산사의 정적이 그리울 때가 있었다.
이즈음처럼 유난히 경박스럽고도 사특하고, 불안정하고도 혼란한 기운이 나라와 지구 전반을 혼돈스럽게 할 때에는 특히 더.
산사의 가장 큰 항아리 뚜껑을 가져와서 연지(蓮池)를 대신했다.
청청해 보이는 연잎을 깔고 그 위에 연꽃의 봉오리를 싼 실을 풀고 꽃잎을 하나하나 펴서 고이 놓았다. 사찰에 계시는 보살님이 끓여 온 뜨거운 찻물,탕수를 큰스님께서 손수 연지에 조용히 부었다.
마치 장미빛석양의 마지막 빛깔이 하늘에 서서히 물감처럼 번지듯 연분홍의 연꽃이 천천히 모습을 들어내고 새로이 피어나는 듯 꽃잎이 너무도 곱게 벌어진다.
큰스님이 계속 탕수를 붓자 드디어 연지에 엷고 큰 꽃잎들이 하나의 아름다운 꿈처럼, 전설처럼, 추억처럼 커다란 연꽃 한송이를 완성해 놓았다.
“아- 현실인데도 마치 꿈의 환영을 보는 것 같다 ”
“본시 한바탕 꿈이지요 ”
한지(韓紙)를 수만겹 물에 불려 겹겹이 붙여서 나무처럼 만든 다탁위에 엎어놓은 비둘기빛 다기(茶器)들 중에서 하필이면 내가 집은 것이 찻잔의 안쪽에 황금을 그대로 거칠게 발라 놓은 것이었다.
그 많은 다기중에 다른 한개는 은을 발라 놓았고, 나머지는 다 비둘기빛도자기 그대로의 찻잔이었다.
나는 얼른 안쪽이 황금빛인 그 찻잔을 내려 놓았다.
그러자 큰스님이 그 찻잔을 들어 내 손에 다시 쥐어 주셨다.
그리고 제일먼저 그 다기에 연화차(蓮花茶)를 손수 부어 주셨다.
“겪어내야 할 한 부분을 겪은 것이지. 어차피 한바탕 꿈인게지요 이제 잊으면 되는게지.”집착이나 회한을 다함께 버리라는 뜻일것이다. 종교를 떠나 일면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해가 아직 뜨지 않을 이른 아침에 연지에 가서 미처 벌어지지않은 반쯤 핀 봉오리의 연꽃에 여린 비단에 싼 차주머니를 넣고 봉해서 그대로 냉동해야 한다. 차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그 하나하나가, 그리고 차를 마실 때 까지도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손과 정성이 많이가는 연화차의 신비한 향내가 한척의 유리배처럼 산속에 떠 있는 큰스님의 다실(茶室)을 마치 나비의 꿈처럼 날아 다니는 듯 하다.
그 광경이 과연 그때의 현실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 혹시 꿈이 아니었을까?
산사(山寺)의 멀리에 보이는 참나무숲이 벌써 그 마른가지들의 윤곽을 더욱 진하게 그려가고 있다. 그 위로 석양의 연한 장밋빛이 수채화의 물감처럼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새들이 이제 둥지를 찾아 돌아오는 시간이다.
겨울의 산사는 저녁이 유난히 빨리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 같다.
다회를 마치고 뜰에 나서자 다시 저멀리 커다란 댓돌 옆에 여전히 사자와 같은 위용의 갈색털의 사자개<황태자>가 석양빛을 온몸에 받아 금빛을 발하면서 그대로 앉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여전히 짖지도 않는다. 속세의 하찮은것에는 전혀 무관심하다는듯한 저 위엄어린 오만의 침묵이 어쩌면 이 광경의 추억을 현실이 아닌 꿈으로 만들어 버릴수도 있으리라
엷은 장밋빛의 노을빛깔이 어느새 조금 더 짙은 보랏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얼마가지 않아 다시 강물에 풀어진 물감처럼 그 보랏빛마저도 서서히 사라져 갈 것이다. 그 위로 연기같은 투명한 어둠이, 그리고 이윽고 깊고도 검푸른 밤이 차례로 새로운 장면처럼 겹쳐져 올 것이다.
저녁을 알리는 범종이 울리는 산사를 뒤로 우리는 서둘러 내려왔다.
달이 떠 오를때에는 역시 두둥실 어디론가 떠 가는 한척의 작은 배 같다는 산사의 다실을 객방으로 내어주겠다는 큰스님의 말을 가슴에 담고.
서울로 돌아 온 후에도 불과 며칠 전의 그 모든 기억이, 그 모든 광경이, 연화차의 그 부드럽고도 신비로운 차향(茶香)조차도 지금 생각하니 언젠가 꾸었던 한바탕 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600년을 버티던 숭례문이 어이없이 불타 버렸다. 아마도 가족이나 친지,주변의 경솔한 생각을 그대로 받아 자신이 이제는 막중한 위치라는걸 잊고 여과없이 해 버린 말 실수 한번으로 지지세가 우르르 내려앉고 있다. 그 일 이외에도 정치권은 연일 얼굴을 붉혀가면서 서로에게 네탓을 소리치고 있다. 국민들은 이미 지칠대로 지쳐서 거의 자포자기 상태로 절망하고 있고 여전히 혼돈은 계속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모든 모습이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볼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무언가 이미 한계점을 넘어서서 모두들 너무 지나치게 막 가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벌써 인선(人選)의 막후 실력자가 분수를 모르는 엉뚱한 곳이라는 말이 세간에 떠돌면서 새로운 불씨가 되고있다. 큰일이다.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해야 하는데...
한번 마음이 떠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게 민심이다.
청와대를 곧 떠나는 노대통령 내외에게는 이미 영욕(榮辱)의 지난 5년이 눈감짝할 사이에 꾸었던 한바탕 꿈인듯 생각 될 것이다.
그런걸 깨닫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금방 다가온다.
물론 눈으로 확인되는 실적과 현실적 실용도 필요하다.
그러나 누구에게든 때로는 허망해 보이는 산사의 정적과 석양의 의미를 한번쯤 생각해 보는 돌아봄의 시간도 필요하지 않을까?
이즈음의 내 작은 바램은, 석양의 산사(山寺)에 두둥실 떠 있는 한척의 작은 범선(帆船)같았던 큰스님의 다실에서 마신 연화차의 너무도 아름다운 차향(茶香)을 심신이 지친 모두에게 보내고 싶다는 것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