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 문제제기
지금의 효창공원은 독립선열 7위 묘역 앞에 효창운동장이 들어서고 그리고 각종 이질적 시설물들이 묘역의 사방을 둘러싼 가운데 백범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는 형편이다.
원래는 공원이 아니라 ‘효창원’으로 별칭 ‘애기릉’이었다. 일제에 의해 효창원으로 크게 훼손 축소되어 유락지인 효창공원으로 불리고 끝내 문효세자 모자의 묘가 서삼릉으로 옮겨가면서 사라질 처지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해방 후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에 의해 독립선열 묘역이라는 새로운 역사로 되살아났다. 1946년 백범은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삼의사의 유해를 모셔왔고, 48년에는 이동녕과 차리석 그리고 조성환 선생의 유해를 효창원에 나란히 안장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자리도 마련해 둔 처지에서 49년에는 김구 주석 자신이 마지막으로 안장되었다. 이야말로 임시정부 선열 묘역으로 온 국민으로부터 추앙 받는 사적지가 된 것이었다.
이 묘역이 탄압받고 훼손되기 시작한 것은 이승만 독재정권의 후반기부터 이다. 묘역의 숲을 벌거숭이로 만들고(1956) 그 한 복판에 축구장인 운동장을 세워(1959년 착공), 독립선열 묘역을 파괴하였다. 박정희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묘소 이전 획책(1962), 테니스장 설치(1966), 골프장 공사(1968), 북한반공위령탑 건립(1969), 어린이 놀이터와 원효대사 동상(1969), 대한노인회관과 육영수 송덕비(1972), 그리고 배드민턴장 등 여러 운동시설과 쉼터, 정자 등 각종 이질적 시설물들이 들어서면서 현충시설인 의열사와 이봉창 의사 동상은 위락공원 속에 뒤섞여 버렸다. 그나마 최근에 백범기념관(2002)이 세워져 다소 명색을 갖추게 되었다.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그것은 우리 현재정치사의 굴절과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서글픈 일이다. 그려면 이러한 탄압과 훼손에 대해 민족의 양심들은 어떻게 대응했는가. 초기에는 묘소의 보존을 위해 소수이지만 적극적으로 싸웠고, 나중에는 소극적 운동으로나마 성역화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응의 결과가 참여정부에 와서 주체적 반응으로 나탄 셈이다.
광복60주년(2005)을 맞아 정부는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효창공원 독립공원화’를 추진키로 하였다. 국가보훈처는 ‘독립공원화 조성사업’을 계획하면서 그 목적을 “효창공원을 성역화하여 민족정기를 고취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 설계와 시행계획에는 운동장을 축구장으로 재건축하고 각종 이질적 시설물은 그대로 두면서 재단장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명백히 민족정기를 고취하겠다는 목적과 명분을 기만하는 것으로 성역화라고 볼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짧은 지면을 통해 그동안 효창원 독립선열 묘역에 대한 탄압 훼손 반대운동을 어떻게 전개되어 왔으며 그 문제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성역화의 방향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짚어보기로 한다.
2 탄압 훼손 반대운동 - 보존과 성역화
(1) 심산의 투쟁
1956년, 이승만 독재정권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몰래 참배’ ‘도둑 참배’가 계속되는 백범의 묘소를 눈에 가시처럼 생각하여 독립선열 묘역의 이장과 효창운동장 건립을 강행하려 하였다. 이 때 <애국선열묘소보존회> 회장이던 심산 김창숙 선생은 숲과 묘역을 파헤치는 공병대 불도저 앞에 들어 누워 그 공사를 저지 하였다. 1956년 6월 9일 도하 신문에 <효창공원을 통곡함>이란 시 (김창숙 문존, 성균관대 학술출판부>를 발표하고 여러 차례 성명서를 내기도 하였다.
남산과 파고다 공원에 하늘을 찌를 듯 크게 선 동상은 현직 대통령 이승만의 81척 높이의 세계최대 동상이었다. 심산은 <이 대통령의 재특명을 기대한다>라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남산과 탑골공원 기타 이 박사의 동상은 다음 세대에는 불도저에 짓밟힐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단언하였다. 이박사의 동상은 다음 세대를 기다릴 것도 없이 불과 4년 뒤 419 혁명 때 불도저 대신 청소차 트럭에 질질 끌려 버려지고 말았다.
1956년 당시, 정부통령 선거에 자유당 후보가 서울에서 참패할 것으로 예상되자 어느 고관이, 효창공원에 백범 묘지에 참배자가 늘어가고 있어 민심을 모으는데 지장이 많으니 어떤 조치가 있어야 되겠다고 보고하였으며 이 대통령은 10만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큰 운동장을 효창공원에 건설하되 육군 공병감 책임하에 건설하라고 특명을 내렸던 것이다. <경향신문, 1960. 6. 11>
심산과 애국지사들의 투쟁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선열묘소는 보존하게 되었으나 공사중지 3년만인 1959년에 묘소 앞의 아름드리 수목들을 베고 아름다운 연못을 메워 버리고 2만 명 수용의 축구경기장을 착공하는 독재정권의 획책은 끝내 막아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심산은 항일 투쟁으로 하체를 못스는 뻗정다리의 앉은뱅이가 되어 업혀서 이동을 하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시승만 독재에 맞서 불굴의 투쟁으로 일관할 분이다. 419 직후 제1회 김구주석 추모회에서 효창 묘역의 5천여 군중을 울음바다로 만들었고, 추모식에 이어 조직된 백범살해진상규명 투쟁위원회 회장을 맡으며,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회장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노력이 516 군사쿠데타로 중단된 채 그도 선열들을 따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선열묘역을 보존하기 위한 투쟁은 516 이후 군사독재정권 기간 동안 상대적으로 미약해 졌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골프장 설치 공사를 막아낸 일은 커다란 성과였다. 1968년 초 김구 주석 묘와 삼의사 묘 사이에 5천여 평의 골프장 설치를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에 <효창원선열묘소보존회> 회장 이인은 여러 종교 사회 단체와 연대하여 공사를 중지하고 원상복구 하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투쟁을 결의하였다. 마침 121 사태와 겹쳐져 사회 여론이 나빠지자 서울시가 공사를 취소하였다.
골프장 설치는 여러 단체의 연대와 단호한 투쟁결의로 막을 수 있었지만 60년대 군사독재 시기에 설치한 그 밖의 수많은 시설물은 거침없이 선열의 정신을 훼손하고 묘역을 잡다한 공원으로 변질 시켰다.
(2) 성역화 운동
516 군사구데타 이후 80년대 중반 신군부 독재정권까지의 기간 동안 효창원 선열묘역은 세상에서 거의 잊혀진 곳이 되었다. 사람들은 효창공원을 효창운동장과 여러 공원 시설로만 떠올리게 되었다. 간간히 놀이터에 갇힌 선열묘소들이 버려지다시피 퇴락하고 위락객들에게 수모를 당하여 황폐화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올 때도 있었지만 안타까운 선열유족 이외에는 대체로 관심 밖이었다. 반민주적 정권이 대중 조작을 일삼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오랜 시간 지속됨으로써 대중은 소수의 저항적 대응을 제외하고는 대개 그 상황에 익숙해지고 관성화 되어갔다.
이런 가운데 1984년 2월, 광복회와 애국 단체들이 총망라하여 효창원선열묘역성역화추진위원회(위원장 이종찬)를 결성하게 된 일은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이 위원회의 노력은 당국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1987년 8월에는 문화재전문위원들로 구성된 효창원성역화기획단 일행이 묘지를 답사하기도 하였다. 이들 기획단 일행에게 백범기념사업회의 효창원성역추진위원회가 내 놓은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 효창원 성역화 범위 확정할 것
(나) 효창원 일원에 담장 설치
(다) 걸맞지 않는 시설물 제거(노인회관, 복지회관, 노인정, 어린이 놀이터, 원효동상, 반공위령탑, 육영수 송덕비 등 철거)
(라) 성역화 시설
9월에는 보훈처에서 효창원 성역화안을 요청해 오므로 성역화추진위원회안을 제출하였다.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3집, 백범학술원, 317쪽>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1989년 효창원 묘역이 사적 330호로 지정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세 곳에 위치한 묘소 울타리 내부(3,110평)만을 사적지로 지정한 것을 보면 역시 이 묘역이 차별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99년 4월에는 서울시 의회가 ‘효창원 성역화 및 백범기념관 건립 촉구 결의안’을 결의하였고, 6월에는 백범기념관건립위원회가 효창원 성역화 사업과 관련하여 주민대표, 광복회, 독립유공자협회, 서울시체육회, 서울시 관계자가 참석한 간담회를 개최하였다. <백범과 민족우동 연구, 3집 백범학술원 332쪽>
이로 보아 효창원 성역화 문제제기는 대체로 백범기념사업회와 백범기념관건립위원회에 걸쳐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1999년경에는 기념관 건립과 관련하여 추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백범 기념관이 건립되면서 성역화 추진요구는 진행의 시간과 순서에서 제2차적인 현안이 되어 지속적인 힘을 받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 하나 짚어보아야 할 것은 성역화 대상의 명칭, 범위, 방향이 분명하지 않음으로써 관계 기관이나 단체가 각각의 입장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 주장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3. 성역화 방향
(1)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성역화 계획은 취소되어야 한다
첫째, “명분 있는 일은 행정적 이해와 관계없이 효창공원의 역사적 의미가 완전히 복원될 수 있도록 특별관리하라”는 노 대통령의 지시와 “효창운동장 철거를 포함하여 법적(사적지) 성격을 명확히 하고 독립공원으로 지정 정비토록 하라”는 이해찬 국무총리 지시에 따라 국가보훈처는 <독립공원 조성사업> 목적에 “민족 성지로 조성하여 민족정기를 고취시키고자 함”이라 명시함으로써 운동장고 이질적 시설물의 철거를 당연시 하였다.
그러나 정부기관협의체인 임시위원회(task force team) 회의와 설계 세부지침은 운동장 재건축, 시설물 존치 등으로 되어 있어서 성역화가 아닐 뿐 아니라 이율배반적이다. 대통령과 총리 지시 내용으로 돌아가서 재논의 해야 마땅할 것이다.
둘째, 국민세금 262억 원을 쓰기 위해 곧 착공해야 한다는 논리는 옳지 않다. 지금의 계획대로 하면 선열묘역을 모독하는 개악이 될 뿐이다. 이 일은 서울시나 체육회나 부서의 이해로 조정될 일이 아니다. 국가의 정체성과 근본에 관한 문제다.
(2) 성역화의 방향
첫째, 효창원 성역화는 공원이 아니라 묘역이어야 한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운동장이 들어서기 이전의 상태, 백범이 만든 독립선열묘역으로 이름과 실제가 회복되어야 한다. 물론 백범기념관과 의열사 등 현충시설을 제외하고, 선열의 영령을 탄압하고 모독한 모든 행위와 시설은 철거되고 공원이 아닌 묘역으로 돌아가야 온갖 모순적 발상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효창원 전체가 사적지화 되어야 한다. 1989년에 사적 330호로 지정할 때 세 곳 묘소의 울타리 내부 3,110평 만을 사적지로 지정한 것은 시설물 철거를 피하기 위한 편법이었다. 독립선열묘역 성역화 차원에서 5만여 평 전체를 사적지화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이 성역화의 기본이다. 명색이 임시정부 독립선열의 묘역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셋째, 효창원 묘역은 국립선열묘지가 되어야 한다. 이름을 어떻게 짓건 국립묘지로 지정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국립묘지에 관한 법률과 시행령을 보면,
(가) 국립 서울 현충원 (서울 동작동 과거의 국군묘지)
(나) 국립 대전 현충원 (대전광역시)
(다) 국립 419 민주묘지(수유리)
(라) 국립 315 민주묘지(경남 마산)
(마) 국립 518 민주묘지(전남 광주)
(바) 국립호국원(경북 영천과 전북 임실)
등이 있다. 여기에 독립선열묘지가 지정되면 국립묘지의 역사성과 정신을 훨씬 분명하게 하고 또한 높이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과 역사를 계승하고 있다. 우리 헌법 전문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를 체험할 기념관 하난 없다. 효창원을 국립묘지로 하고 거기에 임시정부 기념관을 놓는다면 백범기념관과 함께 이 묘역 전체가 임시정부기념관이 될 것이며 헌법정신에 적실 할 것이다.
그동안 대한민국 정부가 선열들에게 저질러온 잘못을 마땅히 사죄하고 독립선열 묘역을 국립묘지로 격상할 것을 제의한다.
세계 어느 나라가 독립선열 묘역을 놀이터로 방치하는가, 묘소를 선인 대하듯 가장 경건히 하는 우리의 전통과 의식을 생각할 때, 효창원을 저렇게 놓아 두고 지난 60여 년 동안 파괴, 훼손해 온 우리가 이웃 나라 일본의 부당성만 말하기에는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