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목 :
호국사상은 영원히 계승되어야
서울 동대 옆 장충공원안의 사명당 동상이 있는 곳에서 지난 10일 제4회 호국성사(護國聖師) 사명대사(四溟大師) 추모재가 있었다.
이날은 전날밤부터 서울시에 비가 내렸는데 사명대사 추모재를 봉행하는 오전 10시 30분경에는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아지고 있었다. 이날 300여명의 추모객들이 모여 사명대사의 공적을 기리고, 추모하며, 육법공양을 시작으로 사명대사 동상앞에 헌다(獻茶)헌화(獻花), 헌향(獻香)을 올렸다.
이날 서명대사 추모재 주최는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 과 사명당 기념사업회 였다.협찬은서울시 중구청(재)삼구복지재단이었고, 후원은 문화체육관광부 서울시 중구의회 조선일보 KBS 한국방송이었으며, 협연은 육군군악대 소리 사랑(국악)이었으며, 육법공양은 한국차인회에서 주도했다.

사명대사 동상
박회장은 대한민국은 지금 북한이 2차례에 걸친 핵실험 및 유도탄 발사 등을 하고, 대한민국을 향해 무력시위와 공갈협박과 공산화 통일계략을 부단히 벌이는 것과,세계적 경제의 위기의 한파속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하고,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사님의 동상을 이곳에 세우신 그 뜻을 받들어 대한민국을 구하는 의병이 되고자 합니다 고 말했다.

사명대사 행장기를 낭독하는 대불총 이석복 사무총장
이날 서울시 정동일 중구청장은 인사말씀을 통해 위대한 역사의 스승이신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당시 의승병 대장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왜적의 총칼 앞에 맞서 풍전등화와 같던 강산을 지키는 데 무수한 전과를 올렸으며, 오직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구국애민의 표상이자 민족의 등불이셨다.고 추모했다. 자신이 4년전 사명대사의 동상이 숲에 덮히고 잡초가 자라나 아무도 돌보지 않는 황폐한 곳으로 변한것을 발견하고, 동상을 덮은 숲과 동상주변의 잡초를 제거하고, 주변을 정비했다고 회고했다.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이조 정치에서 불교가 받은 탄압은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불교가 이조에 들어 탄압을 받은 것은 고려말에 승려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인과응보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탄압속에 신음하는 조선불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 서산, 사명대사를 중심으로 분연히 일어났다. 사명대사의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보고 팔도의 의승병이 운집했다.

인왕산 보문노스님과 필자
칠백의총(七百義塚)이 웅변해주듯이, 의승병들은 관군과 함께 전선에서 몰사하기도 했다. 서산, 사명대사와 무명의 의승병들의 활약덕택에 후세의 승려들은 탄압을 면하고, 인정과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무슨 조화인가? 언제부터인가, 승려들의 마음속에 서산,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을 추모하고 계승하는 호국정신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앞서 중구 구청장이 밝혔듯이, 한국불교의 자랑스러운 조상인 사명대사의 동상이 숲속에 덮히고, 무성한 잡초로 황폐화 해도 승려들은 무관심이요, 추모재에 참석하지도 않는 것이다. 이번 4회 추모재에도 타종단 승려들은 가사장삼을 정제하고 참석했다. 그러나 조계종 승려로서는 필자 혼자였을 뿐이다.

육군 수방사 군악대
사명대사 추모재는 아랑곳 없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일부 승려들은 ‘108인 시국선언’을 하고 있었다.그들은 “MB, 군사독재 강압통치 중단하라”고 외쳤다. 그들은 이명박 정부는 지난 시절 민주화 운동으로 이룩한 이 땅의 민주주의가 성숙하기도 전에 암울했던 군사독재 시대에 자행되던 강압통치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주장에서, “1. 이명박 대통령은 악화일로에 대북관게를 개선하기 위해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성실히 이행하여 한반도의 평화정착에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호국의 달, 사명대사 추모재를 망각한듯 했다.
잊혀져 가는 사명대사의 동상과 추모재에 어찌 승려들의 탓만 하겠는가? 사명대사의 동상이 있는 지근거리에 조계종의 종립학교인 동국대학교가 있다. 동국대학교 이사회에 승려들이 포진해 있다. 동대에도 교수 직함을 가진 승려들이 있다. 또 불교를 믿는 세속 선남선녀도 있을 것이다. 왜, 사명대사의 동상이 숲과 잡초에 황폐화 되어도 오불관언(吾不關焉)이요, 추모제는 더더욱 오불관언(吾不關焉)이라는 것인가? 통탄할 일이 아닌가? 사명대사의 동상과 주변을 깨끗이 정비하여 추모재를 성대하게 봉행할 수 있도록 협조한 정동일 중구청장은 조계종 총무원에서 감사패를 전해야 하지 않을까?
임진왜란시 사명대사가 전국 승려들에게 봉기할 것을 바라는 창의격문(倡義檄文)의 세 단락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전략, “들으니 대신들은 아직도 당파싸움에서 꿈을 깨지 못하고, 장수들은 싸우기도 전에 달아날 길만 찾는다고 한다. 또 남의 나라에 구원병을 청하고 남의 덕에 살려고 한다. 이 얼마나 통분할 일이며 한심한 노릇이나!”
“이제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살릴 큰 일꾼은 오직 우리 승도들밖에 없는가 한다. 주야로 생사초월하는 공부하였으니 겁날 것이 무엇이며, 혈혈단신에 걸릴 것이 무엇이냐. 더구나 불보살의 가호 있음에랴. 모두 일어나 평안도 순안군 법흥사로 시급히 모여 오라. 나는 여기서 기다리겠다”
“늙고 병들어 촌보를 옮기지 못할 자는 각 사찰에서 지성껏 기도하고, 한 팔로라도 몽둥이를 들 힘이 있는 자는 다 뛰어 나오라. 그리하여 저 마군이를 쳐부수어 항복받고 나라를 구제하자!”>
이날, 이석복 대불총 사무총장은 사명대사의 행장기를 낭독했다. 이석복 총장은,사명대사는 탁월한 전법으로 왜적을 물리쳤을뿐만 아니라 당시 문무관들은 감당할 수 없는 강화협상을 성공시킨 분이시다” 라는 것을 전제한 후,사명대사는 1604년 선조임금은 사신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사명대사는 당시 실권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쓰를 만나 불침(不侵)의 강화조약을 맺고, 납치된 포로 3500여명을 조선으로 귀환시키고, 일본군이 약탈해간 국보 등의 보물을 돌려받는 업적을 남겼다. 이는 성사(聖師)가 아니고서는 성공시킬 수 없는 외교의 성공이었다.”고 말했다.
사명대사의 외교적 성공은 당시 임금 선조을 비롯해 전 백성이 감동했다. 온백성이 추앙하는 사명대사를 선조는 당파싸움을 쉬지 않는 대신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명대사를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인 영의정으로 제수했다. 그러나 사명대사는 군명(君命)은 어길 수 없다며 사흘동안 영의정직에 있다가 사직하고 해인사 홍제암으로 돌아갔다. 공수신퇴(功遂身退)를 확실히 보여준 것이다. 1610년, 음8월 26일, 사명대사는 홍제암에서 입적했다. 세수는 67이요, 법납은 54세였다.
이날 사명대사 추모재에는 임충빈 (현)육참총장의 배려하에 육군군악대가 출연했다. 군악대는 추모가와 사명대사 찬가를 연주하여 추모재식장을 숙연케 했다. 식이 끝날 무렵에는 그 옛날 의승병들이 구국을 위해 보무도 당당히 전선을 향해 가듯이, 군악대는 식장이 떠나가라 행진곡을 연주하여 갈채를 받았다.
차제에 제언드리고 싶다. 2010년 호국의 달인 6월에는 사명대사 한분만 추모재를 봉행할 것이 아닌,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진충보국(盡忠報國)한 의승병들 전원의 합동위령제인 충의재(忠義齋)’를 대불총이 주관하여 봉행하였으면 한다. 충의재 대상은 서산대사를 위시하여 사명, 뇌묵 등 대사들과 무명으로 전사한 5만 의승병들이다. 무명의 의승병들은 비석 하나 없이 역사속에 사라졌다. 그들을 위령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바친 충의열사(忠義烈士)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고 발전시키자는 뜻이다. 2천만 불교도는 물론 여타 충의 애국지사들도 환영하고, 동참하리라 믿는다.글, 이법철/사진,장재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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