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는 사옹원(司饔院)이 궁중이나 관청에서 사용하는 도자기를 제작했는데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전국에 백자를 굽는 가마인 자기소가 139개, 분청을 굽는 가마인 도기소가 195개소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 초기에는 분청사기가 특징 있는 도자기로 많이 제작되었으며 거칠면서도 자유분방함을 지닌 분청사기는 점차 백자화되고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자취를 감추었다.
분청사기(粉靑沙器)는 청자 태토나 짙은 회색조의 거친 태토 위에 백토(고령토)를 물에 풀어서 그릇에 바르거나 덤벙 담근 후 여러 가지 기법으로 무늬를 나타내고 그 위에 유약을 씌워서 구워낸 도자기를 말한다.
분청사기의 종류는 백토 분장과 무늬를 장식하는 기법에 따라 분류된다.15세기에는 상감청자와 연결되는 상감무늬와 인화무늬가 주로 만들어진다.
16세기에 와서는 분장한 귀얄자국이 거칠어지며 무늬도 힘차고 추상화하는 경향을 띤 분청사기가 나타난다. 이 때 분청사기는 기법에 따라 귀얄 덤벙분청이 있고 박지 무늬(분장한 그릇표면을 긁어내는 기법), 조화 무늬(날카로운 칼끝으로 만든 무늬), 철화 무늬(분장 위에 철회로 그린 무늬) 등이 있다.
순백자는 흰색 이외에 다른 색깔의 장식 무늬가 없는 것이며 백자(白瓷)는 조선 초부터 세련되기 시작하여 15세기 후반부터는 사옹원(司饔院)이 맡아 도자기를 굽던 광주분원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조선 시대의 순백자는 단순한 형태와 흰색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며 청화백자 등 모든 백자의 기본이다.
백자에 푸른색을 내는 천연 코발트 안료로 무늬나 그림을 그려 구워낸 것이 청화(靑華) 백자이며 15세기 중엽부터 청화 백자를 굽기 시작했으나 코발트 안료는 페르시아 지방에서 가져온 것을 중국을 통하여 수입하여 썼는데 회청(回靑)이라 부른다. 조선 후기에는 토청(土靑)이 개발되고 회청의 수입이 원활해져 무늬가 일부 지나치게 번잡스러워지기도 하였고 진사나 철화를 함께 사용하여 색깔을 내기도 했다.
백자(白瓷) 바탕에 석간주 등 산화철 안료와 무늬를 넣은 것을 철화(鐵畵)백자라 부른다.산화철의 안료는 다갈색, 흑갈색, 녹갈색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철화백자 또는 백자철회문이라고도 하며 철화 무늬가 일반화되고 세련되는 것은 17, 8세기였다. 철화백자는 힘차고 추상적이거나 익살스러움을 표현한 것이 많으며 조선 후기에 오면서 진사(辰砂)와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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