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은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씻고자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서인계 대청(對淸) 강경파를 중용하여 북벌(北伐) 계획을 추진했다. 효종의 청을 군사적으로 응징하는 북벌(北伐) 을 이념적으로 지원한 북벌론은 양란 이후 체제 붕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지배층의 대내적인 지배안정책이었다.
효종은 이완(李浣)·유혁연(柳赫然) 등 무신을 특채하여 군비강화가 추진되기 시작했고 1652년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御營廳)을 대대적으로 개편·강화했으며, 금군(禁軍)의 기병으로의 전환, 모든 금군의 내삼청(內三廳) 통합, 수어청(守御廳)의 재강화를 통해 군사강화책을 모색했다. 1654년 3월 유명무실했던 영장제(營將制)를 강화, 각 지방에 영장을 파견하여 직접 속오군(束伍軍)을 지휘하게 했다.
효종은 1655년에는 능마아청(能兒廳)을 설치하여 무장들에게 군사학을 강의하기도 했으며, 평야전에 유리한 장병검(長柄劍)의 제작,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통해 조총 제작 등 무기의 개량에도 힘을 기울였고 2차례의 나선(羅禪 : 러시아) 정벌에서 군비강화의 성과가 나타났다.
효종은 김육(金堉)의 건의를 받아들여 1652년 충청도, 1653년 전라도 산군(山郡) 지역, 1657년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서 대동법(大同法) 을 확대 실시했다. 전세(田稅)도 1결(結)당 4두(斗)로 고정하여 백성의 부담을 크게 경감시키는 한편 1655년 신속(申洬)이 편찬한 농가집성(農家集成)을 간행·보급하고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유통시키도록 했다.
1656년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편찬한 내훈(內訓)과 김정국(金正國)이 지은 경민편(警民編)을 간행·보급하여 전란으로 흐트러진 사회윤리의 재정립을 시도하기도 했다.1653년 역법(曆法)을 개정, 24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간을 계산하여 제작한 시헌력(時憲曆)을 사용하게 했다. 1654년 인조실록을, 이듬해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간행했으며, 1657년 선조실록을 선조수정실록으로 개편·간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