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최경선
<영화감상>포화 속으로 ..계급도 없이 군번도 없이 전선으로..전쟁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다'는 교훈 되새겨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제작된 포화속으로’란 영화를 관람했다. 120억 원을 쏟아 부은 대작 영화답게 실감나는 전투장면을 묘사한 흔적이 곳곳에서 엿보였다.
포화속으로’는 한국전쟁 초기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난 국군이 유엔군의 참전을 기다리며 남은 전력을 낙동강에 총집결시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던 때에 포항에서 인민군 766유격대를 맞아 싸운 학도병 71명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다.
영화는 1950년 8월 8일 경북 영덕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계급도 군번도 없는 71명의 학도병들은 전쟁에 참가해야 하는 의무가 없음에도 교복을 입은채 전쟁터로 뛰어 든다.
당시 한국군은 북한군 제5 보병사단의 남진으로 영덕이 초토화되고, 한국군 제3 보병사단은 북한군 제12 보병사단에 의해 퇴로가 차단된 상태였기 때문에, 만약 포항 시가지마저 북한군의 손에 넘어간다면 제3 보병사단은 전멸할 위기에 놓여 있다.
포항을 지키던 강석대(김승우) 중대장은 낙동강을 사수하기 위해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고, 총 한 번 제대로 잡아 본 적 없는 71명의 학도병에게 포항을 맡긴다.
학도병들은 포항여중에서 제3 보병사단과 포항 시민들이 무사히 철수할 수 있도록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학도병 오장범(탑)은 전투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중대장으로 임명되고, 소년원으로 끌려가는 대신 전쟁터에 자원한 구갑조(권상우)는 오로지 북한군에게 총살당한 부모의 복수심만 가득하다.
오장범은 골목대장조차 해 본 적이 없다며 중대장직을 거부하지만 “마음을 움직여라. 그러면 모두 너를 따를 것이다”란 강 대위의 말을 수용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강 대위는 “학도병은 군인인가? 군인이 아닌가?”란 질문을 남긴채 낙동강 전선으로 투입되고, 국군 제3 보병사단이 사령부로 사용되던 포항여중에는 학도병 71명만이 남게 된다.
이 때만 해도 학도병들에게 전쟁은 현실이 아니었다. 지급받은 소총을 장난감 쯤으로 여기며 총알 한 발 씩을 쏴 보는 것으로 훈련을 대신하고, 그저 강석대 대위가 빨리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여린 마음의 어린 소년들이었다.
이때 북한군 766유격대장 박무랑(차승원)은 낙동강으로 향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포항으로 진격한다.
드디어 8월 11일 새벽 4시, 71명의 학도병들은 인민군 766 유격대와 맞선다. 오장범은 ‘오마니’를 부르며 신음하는 어린 인민군을 차마 죽일 수 없어 갈등하지만 중대장이란 책임감으로 사살하고는 “어머니! 저는 오늘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명은 될 것입니다”라고 독백한다.
이 독백은 포항전투에서 전사한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이었던 이우근 학생이 어머니에게 쓴 편지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 편지는 어머니에게 부쳐지지 못했다. 전사후 그의 주검을 수습하던 동료에 의해 이 편지가 발견돼 세상에 알려졌다. 지금도 이우근의 묘비에는 이 편지글이 적혀 있다.
이후 영화 중간에 언급되는 오장범의 독백이나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글은 모두 이우근의 편지글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학도병들은 “학도병은 군인이다”를 외치며 오후 3시까지 11시간 동안 무려 4차례에 걸친 격렬한 교전을 벌이며 북한군의 침공을 저지했다.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데다 가진 무기라곤 M1소총 한 자루와 실탄 250발씩이 전부인 학도병들이었지만 이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오후 3시를 기해 포항여중은 북한군 766 유격대와 제12 보병사단에게 함락되었고 이 전투에서 북한군 60명 사망, 학도병 71명 중 47명이 전사했다.
형과 동생이 함께 학도병에 참가하여 동생의 마지막 고통을 들어주기 위해 형이 자기 총으로 동생의 가슴에 총을 쏜 장면에서 '전쟁이 얼마나 잔악한 죄악이며 전쟁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다'는 교훈을 일깨워 주었다. 계급도 없이 전선에 투입된 학도병들. 그들에게 조국은 어떤 의미였을까? 강석대 대위가 자신들을 구하러 오리라는 희망은 조국에 대한 희망이 아니었을까? 이제 그들은 가고 조국은 살아 남았다. 그리고 후세인 우리가 그들이 피로 남긴 풍요를 누리고 있다.
학도병들이 포항에서 11시간의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제3 보병사단 사령부와 주력부대는 무사히 포항을 탈출하고,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재한 감독은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꽃같이 어린 소년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진 희생정신을 기리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전쟁영화는 아무리 사실적으로 묘사한다고 해도 참상을 그대로 전달하지는 못한다. 영화에서 보여진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장면들은 실제에 비하면 극히 미약할지도 모른다.
죽어가는 오장범을 끌어안은 강 대위는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내뱉는다. 영화 초반 오장범이 죽어가는 소대장 곁에서 손을 잡아 주는 것 외엔 해 줄 게 없었던 것처럼. 이 말은 곧 국가가 국민에게 하는 말이다.
당시 그들의 나이 아직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 할 10대였다. 총소리만 들어도 놀랄 어린 학도병이 거침없이 진격해 오는 전차와 포탄의 공포 앞에서 얼마나 두려웠을까?
이우경은 편지에서 어머니에게 “상추쌈이 먹고 싶고,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다”고 말했다. 그 소박한 평화가 그들에겐 버거운 희망이 될 정도로 외롭고 두려웠던 것이다.
누군가는 인민군 유격대장 박무랑(차승원) 소좌의 카리스마와 학도병에 대한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거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전쟁 초기 북한군의 실체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김일성은 한반도 적화통일을 위해 ’46년부터 전쟁을 준비했다. 구소련으로부터 무기와 장비를, 중국으로부터는 병력을 지원받았다. 이때 중국이 북한에 지원한 병력은 중공군이 아닌 중공군에 몸담고 있던 조선인 군인이었다.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풍부한 전투경험을 쌓은 5만 4천명에 달하는 이들은 조직과 장비, 무기를 그대로 가지고 북한군에 투입되었다.
이 정예군인들이 주축이 된 북한 인민군 유격대장의 눈에 교복을 입은 학도병이 군인으로 보였을리는 만무하다. 따라서 박 소좌의 학도병에 대한 동정심은 민족애에 바탕을 둔 인간미가 아니라 ‘애송이 소년들에 대한 자신감과 우월감, 볼펜과 총과의 싸움에 대한 비웃음’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반면 학도병들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절박함’과 ‘더 이상 뺏길 수 없다는 울분’이 더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6.25전쟁을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 전달해야 할 과제를 부여 받았다. 학교에서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고, 전교조에 의해 우리 교육현장이 왜곡되고 있다고 우려하고 한탄하기 보다는, 6.25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매년 한 편 씩 만들면 어떨까?
국방부가 후원하고 영화제작사가 힘을 합친다면 자칭 진보세력이 수구보수꼴통으로 매도하는 기성세대들이 조국을 위해 어떤 희생을 감내했는지, 같은 비극을 후세에 남기지 않기 위해 어떤 마음을 가졌었는지 이해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우리에겐 무궁무진한 소재와 능력과 기술이 있다. 한국 영화가 세계시장에서 각광받고 있는 이때,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우리가 어떤 역경을 딛고 오늘의 한국을 이루어 냈는지를 세계에 알리는 것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오늘 이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잊고 있던 그들이 우리 가슴속으로 다시 살아 돌아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ko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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