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재외동포 문학상 공모 (논 픽션)
공모자 냉전해체, 그 후유증을 앓고 있는 한반도, 30년 간 그 현장을 목격한 기자의 증언 미주통일신문 배부전 기자
1970년대 남북한 냉전상황 (박정희 대통령 시대) 1980년대 남북한 냉전상황 (전두환 대통령 시대) 1990년대 냉전해체 - 지공상황 (노태우-김영삼 시대) 2000년대 민족화해 협력 추진상황 (김대중-노무현 시대) 2010년 중반기 대북 상생 공존상황 (이명박 대통령 시대) 북한 실체를 모르는 서울 관련 장관들, 그리고 북한이용 전략 무지 ---
1. 1984년 경. 서울 통일부 장관실. 내가 통일부를 방문하자 장관, 차관, 기획...팀 등 통일원 참모 4, 5명이 나를 반겨주고 대담을 했다. 그 때 한 참모가 {어제 일본 언론에서 김일성이가 아프다"고 하던데.....} 말에 기자가 순간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소위 정부가 일본 통신 기사를 읽고 북한정보를 말하나 ? 또 김일성은 아주 건강한데... 죽을 것 같다니....이 사람들이... "나는 크게 당황했고 정부 대북 담당자들에게 순간 냉소적으로 변했다.
2. 다음, 나는 민주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서정화 사무총장으로 부터 한강변이 있는 강남 식당에서 식사 대접을 받았다. {미주통일신문이... 우리 민주평통 부설 신문이 되면 좋겠는데...}라고 말했다. 그 때 나는 또 실수를 한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뜻을 몰라 묵묵부답만 했다. 나도 참 무식한 기자인가 보다. 도와 주겠다는 사람들의 제의를 물리치다니 말이다.
정말 귀신이 그 때부터 붙었나. 하긴 1985년 50,000 달러 짜리 복권 2장이 연달아 당첨 되었는데, 나는 그것이(골든 벨 3개 아닌 2개라서 당첨이 아닌 줄 알고) 아파트 앞에 내다 버린 일도 있었으니. 그 때 그 골든 벨은 2개만 나오면 당첨이었다는 사실을 3일 후 쯤 알았다. 그러나 내가 버린 아파트 앞 복권 종이는 보이지 않았다)
3. 다음 통일원 홍보담당 과장(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내가 서울에 오자 이틀 동안 계속 나를 따라 다녔다. 이 사람이 왜 이래 ? 근무 시간에 밖에 나와 돌아다녀 ?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다고...그 때 이틀 후였던가. 그는 마침내(?) 찻집에서 엉뚱한 소리를 한다. {.... 배 기자님이 빨갱이가 된다고 안기부 보고가 있습니다. 빨갱이가 될 분이 아니군요} 기가 찰 일이 이미 미국에서부터 발생했으니.
4. {한건 주시오.... 미국 엘에이에 있는 미주통일신문을 하는 배부전 기자 말이요, 그 사람 배후가 누군지를 알아 봐 주시오. 그런 신문을 혼자서 할 리가 없고...그 뒤에 누군가가 있어요. 미국 엘에이 영사들도 감을 못 잡겠다고 해요} 이 말은 그로부터 27년이 지난2010년 4월 경 LA 거주자이며 북파 공작원 출신 강철산 씨가 나에게 당시의 스토리를 알려주어 알았다. 그 때 강철산 씨가 안기부와 밀착된 인사, 그가 서울에만 들어가면 요원들이 접근, "배기자.. 그 놈의 배후가 ?......" 정보를 캘려고 달려왔단다. 오, 주여....
5. 1987년 5월 경. 서울 통일부 김경섭 차관실. 김경웅 공보관 배석. {미주통일신문은 대통령각하께서... 내년 새해부터 정부자금이 나갑니다. 열심히 하십시오. 이젠 서울에선 누구도 배부전 사장님을 손 댈 분이 없을 것입니다.... 일본엔 통일일보, 미국엔 통일신문을 지원방침이 섰습니다}
6. 그 이전, 나는 경기도 이천에서 도자기를 굽고 있다는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을 만나러 갔다. 그 때 나는 그 분을 만나 장시간 대화를 할 때 불쑥 그런 말이 튀어 나왔다. {북한과 대화할 때 그 북한이 {우리에게 위장전술) 사기를 치는 수법이 보이지 않던가요 ?}라고 묻자, 그 분은 의외의 기자 질문에 약간 당황해 했다. 즉, "이게 무시기 소린가 ?" 한참 그 배경들을 분석하고 있었다. (중략)
7. 다음,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 대한항공 858기 공중 폭파 마유미 서울압송. 그 때 나는 서울방문 중, 대선 상황 때 서울 현지에서 또 신문을 제작 발행했다. 김대중 후보의 불순 사상 등에 포커스를 맞추고 공격하는 기사가 도배질이 되었다. 그런데, 여당 캠프 측에서 {배 기자는 언제 미국에 갑니까 ? 빨리 서울을 나가세요... 김대중 비판말고...} 라는 전화가 왔다. "아니 이게 무시기 암시 인가 ? " 그 후 '사고'가 났다. 빚쟁이가 달려오더니......중략.
결국 나는 서울을 떠났다. 엘에이에 도착한 12월 초, 나는 화가 났지만 기자근성을 속이지 못하고 [노태우 후보 당선 가시권에] 톱 뉴스로 활자를 뽑아 호외용 신문을 타운에 뿌렸다. 그 신문은 나중에 서울 보안사령부 대선 관리 팀에서 미주통일신문 호외용 100만 장을 복사, 서울 장안에 뿌렸다는 말을 들었다.
8. 전두환 대통령 임기 말에 나타 난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북한을 탈출했다 !]는 긴급 뉴스.
그들이 뉴욕에 안착, 미국정부의 보호를 받을 때 1987년 구정을 맞아 LA에 있는 귀신 언론인 배부전 기자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발적으로 그들 부부가 LA도착, 코리아타운 소재 우래옥 식당에서 50여명의 친지 영화인들을 만나 만찬을 할 때, 기자가 괜스레 그 식당으로 발걸음이 움직였다. 정말이다. 나는 그 날 무슨 일로 그 식당에 갈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 날 오후 6시 넘어 발걸음이 자동으로 우래옥 식당으로 찾아가고 있었다. 귀신이 붙었다는 증거.식당 안. 마침 신-최 두 부부가 마이크 앞에 서서 말을 하고 있었다. 신상옥 씨는 검정안경을 끼고 서 있었고 그 부인 최 여사가 참석자들에게 북한소식을 브리핑을 하고 있었을 때 였다. 그 순간, 기자가 최은희 여사의 북한 생활들을 10여 분간 들을 때 "아 ? 이상한데... 저건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이 아닌데... 피랍자들이 북한 비판은 하지 않고... 표정이 또 왜 저래 ? 탈출자들이 아닌데 ?.....*&^%$#*& "나는 그들이 좀 이상하게 보였다.
나의 직관력은 그랬다. 나의 북한상식 등으론 이해가 가지 않는 그들의 진솔한 액션이 아닌 배우들의 연출, 연기를 하는 그들의 북한생활 고백 스타일이 나의 안테나에 걸렸다. 나는 잠시 후 두 부부의 인사말이 끝나자 곧 바로 그들 부부 앞에 바짝 좁혀 다가섰다. "너희들 누구야 ?" 라는 식이었다.
최은희 여사는 1974년 경 내가 당시 '코리아 라이프'지 편집을 할 때 만난 구면. 신상옥씨는 식당 안 실내인데도 색안경을 낀 채 입은 꾹 다물고 아주 거만한 자세로 섰고, 그 곁에 섰던 최은희 여사에게 나는 준비 없는 말을 했다. {김일성 건강이 어떠세요 ?...}물음에 최 여사는 {걸음걸이가 불편해....귀가 약간 어둡고...} 답변. 순간 (기자의 감각이다) 신상옥씨의 굳은 표정들이 탈출자들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는 것. 최 여사 역시. 그러나, 그 때 그들이 위장탈출 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여하튼 파티는 끝나고 우리들이 식당을 나설 때 그들 부부가 쓴 수기 (조국은 저 멀리) 글에서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의 정상적인 탈출이 아닌 김정일과의 합의 하에 징기스칸 영화를 제작하는 등의 목적으로 탈출극을 위장했다는 사실이 포착되었던 것. 내가 1982년 북한연구 취재결과 5년 만에 이 같은 노하우가 인정받게 된다. 그래서, 기자에겐 늘 귀신이 붙었다고 하지 않나. 그런 자들이 스스로 "날 죽여 주시오"라고 말하면서 나에게 달려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나중에 정부당국에서도 나의 특종사실을 인정해 주었다.
서울 경찰 정보 팀들 까지 나의 북한실력을 알고 있을 정도였으니) (시간과 지면 관계로 첫 부분에 대해 충분 사실관계들을 정리 못해 죄송)그러니까, 신-최 두 부부가 수기로 발표한 책자에서 내가 5년 이상 입수, 분석했던 북한선전용 잡지 신문에서 본 금강산, 묘향산, 백두산 등 101장 정도의 관광사진을 편집한 저의는 북한선전용으로 판단했으며 또 그러한 사진을 소지하고 탈출했다는 자체도 가짜였고, 나중에 확인이 되었으나 그 사진들은 모두 일본 조총련 등에서 제공받은 것으로 추론이 가능 했다.
특히 김정일과는 2회 김일성과는 1회 녹음내용에서 김정일은 미국과의 관계개선 용의가 있다는 미국 접근용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사실파악(또 녹음기 입수 경위 및 녹취한 장소에서 사전 각본에 따른 상호 합의하에 행한 녹취였다고 판단했던 것) 및 영화광 김정일은 이들 부부와 [3년 계약에 따른 북한영화 국제 영화제 수상 조건]에서 성공한 이들이 징기스칸 대왕을 김일성 수령과 동격시 하는 영화제작을 위해 이들 부부가 미국 대사관을 의도적으로 찾아 갔으며 (탈출현장 도시 '빈' 수도에는 한국 대사관도 있다.
여기서도 이들의 위장탈출 목적 등이 드러난다), 탈출 당시 일본 모 통신 기자(조총련 소속)의 안내로 순조롭게 호텔을 빠져 나온 경위 및 당시 신-최 부부를 경호(?)하는 팀들이 예전과 달리 이들의 외출을 묵인했고, 나중에 이들이 신-최 부부의 행방을 좆는 척 하는 생쇼에서도 위장탈출극 임이 그러난 것.(그들의 수기에서 발견된 위장탈출극 증거가 무려 30여 케이스.)나는 그 날 밤 약 4시간 만에 문제의 수기를 독파하고 {위장 탈출이다 !}라고 판단, 뒷날 아침 엘에이 총영사관 파견 안기부 요원에게 전화로 알렸다. {우리도 이상하게 생각하는데...증거가 있어요 ?}라고 묻기에, 나는 거침없이 {증거 있다 ! 책 속에 있다 ! }라고 말했다.
{책 속에 ?........... }나는 {지금 호외 신문을 뿌리겠다....}라고 말하고 400달러를 하숙집 주인에게 급히 돈을 빌려(돈을 빌릴 때도 에피소드가 있다. 내가 돈을 빌리려고 아파트 주인 할머니에게 아주 흥분된 어조로 "할머니, 신상옥이와 최은희가 탈출한 게 아니고 김정일이와 짜고 위장탈출을 했어요 !! 지금 신문 호외를 뿌려야겠는데... 돈이 없어서.."할머니는 {뭐라고요 ? 신상옥이와 최은희가 위장탈출을 했다고 ? 아이고... 이게 무슨 소리 ?.. 암, 신문을 내야지.. 여기 4백불 빌려 드리지..")
[신상옥-최은희 부부, 위장탈출 가능성 짙어 ...] 라는 헤드라인 뉴스를 뽑아 호외를 인쇄하여 타운에 뿌렸다. 3천 부였던가. 반응이 굉장했다. 타운에 벌집을 쑤셨다. 연속 호외용을 뿌렸다. 난리가 난다. 교민들의 반응이. (중략)
나의 신문이 보도된 후 미국 CIA 한국 담당 000 요원이 나를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당시 우리는 웨스턴 7가에 있던 '시연회관'에서 만났다. 그는 의자에 앉아마자 나에게 첫 마디 인사가 {신상옥 부부 위장탈출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 라고 첫 질문을 던진다.
나는 {북한 선전용 책자와 신문기사를 잘 읽으면 알 수 있다. 북한의 움직임들을 알 수 있다...} 그러자, 그는 {어떻게 ?.... }{네에, 북한에서 오는 신문 잡지와 한국에서 오는 내외통신(당시는 안기부 부설기관에서 발행하던 일간 '내외통신')을 읽으면 알 수 있어요}
{아, 그래요... 무섭지 않아요 ? } {나는 무섭지 않아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언론을 하니까요...} { ???? .... 영사관에서 도와주지 않습니까 ?} {내가 오래 전에 실수를 하는 바람에 ... 지원을 못 받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 ?} {.... 부도수표를 내는 수밖에 없지요} {연방정부에 자금을 신청하세요... }그 때 그는 호주머니에 녹음기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천하의 배부전 기자가 누군가 ? 식사 후, 우리는 헤어졌고, 일주일 후 그는 나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연방정부에 신청을 했느냐 ?}고 묻는다. 그 때 연방정부 신청을 하려면 법무사, 변호사가 작성하고 수수료 등 500달러 이상이 있어야 했다. 나는 포기했다)
그 후, 2년 만에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위장탈출 했다는 결정적인 증인이 나왔다. 미국 LA 헐리우드 영화사에서 근무하는 서울대 총장 출신 유진오 박사의 친척이 북한과 공동으로 영화를 제작하겠다고 평양에 가서 김정일을 자주 만났던 그가, 그 날 술에 취한 김정일이가{... 신상옥이 짜아식, 내가 내 보내 주었는데 날 욕해 ? ....}불만을 터뜨렸다고 했다.이 말을 들은 그가 LA에 돌아와서 그의 친구 한상만 씨와 얘기하던 중 이 사실이 드러났다. 이 말을 들은 한상만 씨(로비스트)가 나에게 {특종 했더군... 신상옥과 최은희는 탈출한 게 아니고 김정일 이가 내 보내 주었대..} - (관련 직, 간접 증거는 약 30여 종 이상)
9. 전두환 대통령 임기 말부터 노태우 대통령 취임 직전까지 나에게 날아 온 서울 편지들,서울시 경찰국장, 국회 사무총장 등등 정부기관장들이 줄이어 나에게 "미주통일신문 사장의 애국심을 높이 치하하고 계속 해외에서 분투노력 해 달라"는 요지의 친필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
나는 그 때 "이건 또 무시기 현상 ? " 웃으면서 반가웠다. 다시 육군 보안사령부에서 까지 보안 유지를 하라"면서 FAX를 통해 주요 인적 등등 정보들이 들어왔다. 아이고..." 나의 즐거운 탄식이었던가.
노태우 정부 출범, 김대중 보다 앞서 대북 포용정책이 가동
어쨌든 1982년에서 1987년이 마감되는 시간대로 진입. 1989년 전후, 소련의 연방 해체로 시작된 돌발적인 동-서 냉전해체 및 재편 상황이 일어났다. 그 때 노태우 대통령은 공산권 접촉을 시작, 중국-러시아 국가들과의 전방위 수교 외교작전이 시작 되었다. 특히 박철언 대통령 특보, 이홍구 당시 통일원 장관들이 '우회로를 통한 북한접근을 시도한다면서 북한문을 노크했다.
이 때, 미국까지 달려 온 통일부 소속 대학교수들이 나를 불러 만났다. {이제 달라졌습니다. 당분간 우리는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조심하세요} 밤 8시경, 당시 올림픽가에 있던 식당 강서회관(지금은 조선갈비)에서 그들은 나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그 때 그들의 얼굴 표정들이 아주 긴장했고 조심스러워 했다.
1989년 경. 노태우 대통령은 [7.7 선언]을 발표, 해외동포들의 북한방문 허용 조치를 취했다. 세상이 놀라기 시작했다. 전두환 전직 대통령 시대와 차별화를 시도한 노태우 6공 정부는, 그 때부터 북한과 도박 게임을 시작했다. 그것은 후일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포용 정책 보다 앞선 시초가 된 것.
그러나 나는 즉시, 신문 사설 등을 통해 [노태우 대통령은....이홍구 통일원 장관 은... 정부는... 어떤 근거에서 북한과 대화하려고 하는가 ? ......우리가 북한으로부터 대화를 하자는 콜을 먼저 받았나 ? 북한문제는 우리가 먼저 나선다고 되지 않는다. 그들이 대화하자고 할 때 가능하다.. 우회로를 통한 접근은 무슨 뜻인가 ?.....]그 후, 소위 5공 청문회, 전두환 전직을 백담사로,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서울 구치소로 각각 유배시키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 여의도 국회는 "노태우 대통령 당선을 위한 마유미의 대한항공 폭파에 대한 노태우 대통령의 대북 사례인가 ? ... 대한항공 공중테러 당시 북한에서 노태우 대통령 후보 캠프에 사전 통보 했나 ?..." 나는 상상할 수 없는 오해의 비약을 했다.그 무렵 나에게 찾아 온 미국 파견 안기부 요원들. 그들은 평소 나에게 인간적으로 대해 주었던 고마운 분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이제부터 우리는 북한의 맏형역할을 합니다.
배부전 기자는 북한에 가서 북한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준비 하십시오 ...}청천벽력의 지령 아닌 언론사 요청에, 나는 그만 허탈감에 빠져 가볍게 웃었다.
{네에 ? 나를 북한에 가라구요 ? 우리가 맏형 역할을 한다구요 ? 안돼요. 북한이 우리 맏형이라고 하는 놈들인데...북한과는 아직은 시기상조입니다...나는 북한에 안 갑니다..북한에서 먼저 그렇게 하자고 했어요 ? }우리의 대화는 끝났다. 나는 다시 찬밥 신세로 전략, 왕따를 당하는 단계로 진입.다음, 내가 노태우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하자, 노태우 대통령 친위대 보안사 팀에서 전임 대통령의 [미주통일신문 지원재가]를 백지화시키기 위하여 3명의(?) 요원들이 LA로 날아와 하기환 이라는 LA 부동산업자의 빌딩에 입주해 있던 미주통일신문의 건물 입주 계약서'에서 나의 사인을 위조하고, 주민등록번호(소시얼 남버)을 이용, 그들이 공모하여 미주통일신문은 법원에 파산시청을 시키는 천인공로할 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즉시 FBI.에 달려 가 이 사실을 신고하고, 위조 사인에 대한 조사를 의뢰하자, Y모 한국 담당 요원은 약 10분 만에 재빨리 돌아 와 {배 선생님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편지에 있는 사인과 대조해 보니 위조사인입니다. 누가 그랬습니까 ? } 라고 물었다. 연방수사국의 위조사인 여부 확인작업 시간이 불과 8분 정도라는 새로운 사실에 놀랐다.
그 때 요원이 {어떻게 하겠느냐 ?}라고 묻기에 나는 {위조사인범을 상대로 재판을 하겠다...}라고 말하자, 그는 {우리도 조사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후 재판에서 50대 백인 판사는 첫 재판에서 위조사인범 용의자 하기환을 법정에서 진술도 못하게 가로 막고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앉아 ! ....입 닫아 ! " 판사는 언론사를 위장파산 시킨 범인에게 이미 유죄를 선고할 액션을 취했다. 고마운 판사. 댕큐 유 아메리카 !
그러나 한 달 후 속개된 정식 재판에서 만난 판사는 태도가 지난번과 달리 180도 가 아닌 2000로 이미 돌변 해 있었다. 판사는 피고인을 감싸고 있었다. 이 웬일 ? 3일간의 재판에서 {위조사인이 아니다}라고 판결. 피고인의 위조증거 사실을 입증했으나 판사는 마이동풍, 사법부 독립'을 악용, 사기판결을 했다. 나는 즉각 영문을 작성, 이 판사를 미국정부 당국, 주지사 등에게 고발했다. 문제의 판사는 그 후 5년 후 죽었다고.
다음, 노태우 대통령의 [7.7 선언]이 발표된 후, 나의 사무실 건물 주인(하기환 부 동산업자. 부동산 사기혐의자)이 나를 만나자고 한다. 건물주 사무실. 나는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대뜸 {이젠 미주통일신문을 집어 치우세요 ! 여기서 나하고 부동산 신문이나 합시다 ! ... 다음 달에 정주영 현대 그룹 회장도
평양에 가는데....}아니 ? 이게 누구에게 하는 말이야 ? 이 쌍놈, 웃기는 넘이네... 내가 누군지 모르고 ? 시건방진 넘 !" 내가 혼자 말을 하다가 {북한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시작.... 그런 말을 나에게 어떻게 하나 ?! } 언쟁이 시작. 이는 필시 누가 조종,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다. 배부전 기자의 반공이념, 대북 냉전사고 틀을 깨라고. (중략) 노태우 정부 팀이었다. 나는 사무실에 올라오자 말아 즉시 이 인간이 친북한계 부동산업자로 추정, 연방수사국에 조사를 의뢰했다.
노태우 정부의 대북정책 실패 요인 분석
나중에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들의 대북 햇볕정책들이 실패했듯, 1990년 전후의 노태우 대통령 팀의 중대한 실책은 역시 [북한정권을 장악한 자들의 '성격' 등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특히 노태우 대통령은 전두환 대통령이 6. 29 선언, 즉 '대통령 선거 직선제' 카 드로 인해 노태우 후보는 당선을 보장한다는 근거가 없을 때 천운의 대한항공기 공중폭파 사건으로 인해 표심을 끌어당길 수 있었기 때문에 그 공로는 당연히 북한 김일성 부자의 몫.
이 때 소련 붕괴 등으로 동서 냉전의 해체에 따른 국제적 정세에 힘을 받아 북한돕기로 작정, 북한 지원책이 강구되어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까지 내 놓고 그것도 부족하여 연말 청와대 안에서 북한산 맥주들을 마시면서{금세기 안에 통일이 가능하다...}면서 자기체면에 걸려 김대중 식 직선항로도 아닌 우회로를 통한 북한접근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판정패 국력만 소비하고 무위로 끝났다.
그 참패의 요인은 김일성 집단이 -지금과 같이 - 노태우 대통령을 기망, 사기를 쳤다는 것. 그 사기의 포인트는 역시 [남북한 연방제 통일안 수용 요구] 조건에 걸려 노태우 대통령이 최종 노린 김일성과의 정상회담 추진이 5년 임기 막판에 허사가 되었다는 것. 다시 말해서, 그것은 북한이 남한을 봉으로 간주, 남한 대통령의 임기 동안 최대한 뜯어먹고 임기 종반에 발로 걷어 차버리는 전문 지능적 사기수법에 걸려 들었다는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대북정책이 막 시작될 무렵, LA서 활동하는 남한 간첩이 나를 만나 설득했던 스토리도 있다. 그는 {배 사장, 우리가 북한을 도와주면 그들이 우리를 배반 하겠어 ? 북한을 비판만 하지 말고 동족을 돕는다는 마음으로(열린 마음으로) 북한에 접근하자....}면서 조심스럽게 나의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했다.그 때 나는 그에게 {그러면 얼마나 좋아요. 그러나 내가 공부한 북한체제는... 그게 아니예요... 그러한 식의 접근정책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북한의 의도는 남한적화가 목표입니다}
다음, 1991년 12월 이었나. 소위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발효를 하기 전, 서울 모 처에서 {북한에서 남북기본합의서를 ... 하자는데 그 의도를 분석 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그 때 나는 하루 동안 북한 관련 자료들을 뒤적여 그 해답을 찾아냈다. 그것은 [모택동 전술]에서 기인하는 실타래 풀기', 즉 일이 풀리지 않고 얽힌 상태에서는 일단 얽힌 실을 하나 하나 조심스럽게 풀어나간다 것이며.. 그것이 다 풀리면 그 때 다시 공격한다...는 식의 전술.그래서, 나는 [북한의 남북기본서 합의의도는... 1년도 넘기지 못하고 끝난다... 북한은 지금 경제난으로 (해법을 찾아) 인해 우리를 이용하기 위하여 위장평화 공세를 펴는 것이다]라고 리포트를 하여 팩스에 밀어 넣었다. 그 때 남북기본 합의서는 그 후 7개월 쯤 후 판이 깨졌다. 그것은 또 1972년 7.4 공동성명 발표 후, 판을 깬북한의 상습사기 행각 패턴과 같은 것.
다음, 노태우 대통령 당시 문제의 [7.7 선언]을 통한 해외동포들의 북한방문 허용 조치로 인해, LA 나성영락 교회 은퇴목사 김계용 씨가 40여년 만에 방북, 김일성 면담거절 등에 따라 현지에서 독살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나중에 추가 취재 중 김계용 목사는 독살을 당하지 않았고 일시 심장이 멎는 약을먹고(점심 때 밥에 약을 탔다. 그 아들의 소행 추정)방에서 쓰러지자 (그 때 그 집앞에는 이미 병원차가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기조들이 김계용 목사를 곧바로 병원차에 싣고 달아났다. 그 후, 김계용 목사는 병원에서 소생, 병원 침대에 수갑을 차고 개목줄 처럼 걸려 있었다는 증언자가 있었다. 나성 영락교회는 이북 출신들의 아지트. 그 곳 친북한 조직들이 김계용 목사를 꼬드겨 방북 시켰다.
다음, 1997년 초, 내가 서울에 도착한 후 노태우 전직의 집 팩스 남버를 알아 낸 다음 이 같은 내용의 글을 팩스에 밀어넣었다. 아침 5시경. 그 시간은 노태우가 인근 테니스 코트 장에 가는 시간대. 이 시간대를 맞추어 나는 그에게 나는 미주통일신문 배부전 기자 입니다.. 당신이 대통령 당시 내가 북한협력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안사 요원들이 미국에 와서 나의 신문사를 위장파산 시켰다.
이 때문에 전두환 대통령이 재가했던 정부지원금이 스탑 되었다. 나는 죽을 때 까지 당신을 잊지 않을 것이다"는 요지였다. 그 이틀 후 신문에서 [어제 노태우 전직 대통령이 테니스 코드 장에 가던 중 심장 등 문제로 병원 행...]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다음, 내가 노태우 대통령의 소위 해외동포 북한방문 허용에 따른 남북화해 협력 무드로 인해 일어 난 부작용(?) 사건 시리즈들.
1. 판문점에서의 북한기자들의 방북유도 요청은 차치하고, 1990년 전후 북한 요인들이 대거 LA방문 러시, 그 중 주유엔 북한 대표부 한시해 전직 대사와 북한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참사 로철수가 LA를 방문, 뒷날 그들이 LA공항을 떠날 때 게이트앞 의자에 앉아 공항취재차 나온 나를 붙잡고 유혹, {평양에 갑시다... 지금 우리와 같이 방북하자고 약 30분 이상 나를 설득 했던 추억 아닌 추억이 있으며,
2. 전술한 대로 한성렬 주유엔 북한 대표부 공사의 전화 콜. 그는 서울 안기부 같 은 북한 국가 보위부 내지는 해외 공작조. 그 때 그는 내가 입으로 "만납시다..."라는 말이 나오기를 학수고대 했었던 분위기 였다. 그러나 나는 노 댕큐.
3. LA 침투 암약 북한 공작원들이 "배 기자님, 형님... 북한에 다녀오세요...가이찌 조총련 보스가 부탁하니... 안 가면 권총으로 쏴 죽일 수밖에 없으니...차도 사주고 여자도 ..." 각종 유혹, 협박, 테러 행위들 발생. 그 중 1985년 경 코리아타운에 있던 세종회관 주차장에서 나에게 공격한 일본 조총련계 20대 청년이(마약 중독자. 북한 간첩들이 행동대 포섭을 할 때 마약을 복용시켜 마약 중독자로 만드는 듯) {형님, 끝까지 말을 안 들어요 ? 갑시다, 그리피스 공원으로.. 거기서 총살 시킬 것이니...} 나는 {내가 죽어도 옷은 제대로 입고 죽어야지, 임마... 나 집에 가서 옷 갈아 입고 갈테니... 같이 내 하숙집으로 가자}면서 유도, 나는 집안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아 버렸다.
뒷날, 집 앞에 있던 나의 자동차가 박살이 났다. 그 피해는 누구도 배상하지 않았 다. 나는 피해를 보았다. 그 후 자동차를 살 돈이 없어서 5년 이상 버스를 타거나 걸어 다녔다. 당시 영사관 파견 영사들은 강 건너 불 아닌 물 구경만 하면서 나에 게 오는 수 십만 불 이상의 자금을 서울 본부 놈들과 짜고 해 먹는데만 혈안이 되었다.
4. 장도영 육군 대장 출신을 유인, 북한 행, 김일성을 만나게 해 주었던 2중 간첩 이라는 닉 네임을 가진 '폴 장' 씨. 그도 어김없이 나를 만난다.
1984년경이었나. 초저녁 6시부터 새벽 1시까지 장장 6시간 이상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다시 3가에 있던 양주 집에서 {배 선생, '통일신문'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우리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조국통일을 위해 교량역할을 합니다....내가 장도영 장군을 모시고 평양에 다녀 왔으나 우리는 빨갱이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평양을 떠날 때 3만 달러를 주었으나 우리는 받지 않았습니다..같이 평양에만 다녀옵시다. 배 선생이 평양에만 다녀오시면 그 땐 미국에 있는 우리 동지들이 미통일신문을 도울 것입니다. 우리 동지들이 100불 씩만 내도 신문사 운영이 됩니다. 사진 식자기도 사무실에 턱 들어 갈 것이고...}
두 사람이(그 중 한 놈은 미국 동포가 아닌 북파 간첩이었다) 나를 설득 회유한다고 술값이 약 200달러 이상이 지출되었고, 새벽 1시 경 내가 {그러나 나는 지금 북한에 가지 못합니다. 좀 더 있다가 가지요...그 때...}
이렇게 거절하자, 그들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흡사 테러를 할 듯한 눈초리였다. 그들 얼굴에 가벼운 경련이 일어났고. 그들의 눈에선 살기가 있었다. 그 후 나는 어떻게 내가 거주하는 하숙집까지 찾아 왔는지 모를 정도로 피로에 지쳤다. 이 사실을 뒷날 총영사관 안기부에 알렸다. 김천웅 영사에게. 그러나 그들은 관련 사실에 대해 일체의 응답이 없었다. 그들은 개새끼들 보다 못한 놈들이었다.
1993년 전후의 김영삼 대통령의 북한 게임은 무승부
어쨌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부가 끝난 후 '3당 통합'을 통해 적군에 합법적으로 침투, 여당 대통령이 된 야당 출신의 김영삼 총재는 북한에 대해선 그 인식이 곱지 않았다. 물론 그 역시 나중엔 북한동포는 우리의 민족이기 때문에 어느 민족 보다 우선적으로 지원이 필요하다고 천명했다. 외국에서 쌀을 수입해서라도 북한을 돕겠다고 부연했다.
그 무렵 황장엽 로동당 비서의 망명, 1994년 북핵 사태로 인해 미국의 북한 핵기지 공격에 반대하는 김영삼 대통령의 태도는 일부 이해할 수 있었으나(이는 미주통일신문의 분석이다) 그 때 김영삼은 미국 클린턴 대통령과 공조하여 일단은 미 항공모함들이 원산지역에서 대기, 영변 기지공격을 하는 액션을 취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랬더라면 북핵 문제는 오늘처럼 장기화 되지 않고 비핵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미주통일신문의 판단이다. 이 또한 김영삼도 북한체제의 속성들을 몰라 역이용 전략들을 활용 못해 오늘 한국-미국정부는 비참한 꼴이 되었다는 것.
특히 김일성과의 정상회담 직전에 김일성 사망 사건은, 그 아들 김정일이가 아버지가 미국에 가서 낚시를 하겠다, 남한 대통령을 만나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그는 아버지의 노망기에 당황, 묘향산에서 특수 살인 팀을 동원 독살 한 것. 이 또한 미주통일신문의 자체 판단이었다. 이 분석자료를 당시 미국 주요 정보기관에 제출했고, 그 뒤 사흘 만에 워싱턴 포스트지에서 [김일성 사망원인은 심장마비가 아닐 수 있다]고 보도했다.
다음, 김영삼 대통령 임기 종반전에, 나는 그의 아들 김현철이가 부통령 역할을 하며 권영해 안기부장 인사권 까지 좌지우지 한다는 등등 놀라운 정보들을 입수, 나는 팩스(그 때는 인터넷이 없었다)기를 동원, 한국 주요 언론사, 정당에 김현철의 무소불위의 아버지 권력악용 남용사례들을 폭로했다.
이러자 LA영사관에 파견된 경찰 담당 영사가 숨이 넘어가는 얼굴로 달려 와 나를 만난 자리에서(옥스포드 팔레스 호텔에서) {자금을 드릴테니... 어제 올린 김현철씨 관련 기사가 오보였다고 써 달라}고 딜을 했었다. 웃기는 영사, 미주통일신문 기자는 주요 기사에 관련하여 오보가 없으며 감옥에 가는 한이 있어도 기사수정이 없다는 언론정신을 몰랐다. "여보 ! 말조심 해 ! .." 그 날 그런 욕을 하려다가 꾹 참았다.
또, 지난 스토리지만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 당시 한국 주요 파트에서 김대중- 김영삼의 각종 비리 파일을 나에게 보내 와 폭로를 요청, 일부 김영삼 후보 부분을 폭로했었다. 나는 그런 일들이 '애국'으로 생각 했다. 이 때문에, 나는 김영삼 대통령 당시 찬밥 신세가 된 적이 있었고, 당시 그 파일을 폭로하라고 파일을 가져왔던 한상만 이라는 로비스트가 미주통일신문에 전달하라는 돈을 서울에서 미리 받아착복 사기를 친 사실을 뒤늦게 감지.
또 다시 생각나는 일은 내가 김현철 관련 기사를 폭로하자 막 출근,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걸려 온 전화, {여기는 뉴욕에 있는 주유엔 북한 대표부에 한성렬 공사입니다..... 김현철 관련 기사를 잘 읽었습니다. 그 전의 기사가 필요한데.... 보내 줄 수 있습니까 ?....}등등 말을 했다.
나는 {아, 그래요... 네에, 네에... }건성으로 말만 하고 끝났다. "야이 개새끼 야, 내 가 누구라는 것도 몰라 ? 빨갱이 새끼가...욕설은 차마 하지 못했다. 이제 김영삼 대통령 시대의 대북문제들을 다이제스트 하는데 있어서 첨가할 특기사항은 북한의 남침용 장거리 땅굴을 확인하고도 김영삼은 개인의 민주화 투사 영웅기록을 남기기 위하여 일체의 정치적 안보적 급변사태를 통해 희석시킬 수 없다는 소아병적 사고가 육군 땅굴 탐사 책임자 전용운 소장 팀이 발견한 강원도 - 동두천 - 임진강 코스를 뚫고 내려 온 북한의 땅굴을 국민에게 공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개탄한다는 것.
1991년 경 미국 LA에 왔다가 만났던 전용운 육군소장과 미주통일신문 대표 등은(강남회관 식당에서) 그로부터 일주일 후 전 소장의 부관 모 중령으로부터 보도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들었던 상기 [땅굴 3개 코스]정보에서 "김 대통령이 이를 공개하지 못하게 한다"는 충격적인 말에 미주통일신문 기자는 참지를 못하고 그 후 3일 만에 FAX를 통해 미국 백악관, 국무성, 각 언론사, 또 한국의 주요 정부기관, 언론사에 북한땅굴 발견, 미공개 관련 기사를 전송했었다.
그로인해 전용운 육군 소장은 전격 예편되었고, 관련 중령의 소재는 파악되지 않았으며, 다만 미국 워싱턴 포스트지에서 당시 칼럼니스트 잭 앤드슨 씨가 미주통일신문의 관련 기사를 발췌 보도하였다. 당시 미주통일신문의 관련 기사를 LA거주 '샘한'(한국명 : 한상만) 로비스트가 받아 잭 앤드슨 칼럼니스트에게 전달하여 보도된 것.
또 하나 추가 사실은, 1996년, 1997년 사이 내가 서울 임진강 접전지역인 경기도 화성에서 땅굴을 파는 보안사령부 출신들과 특히 우물을 파는 회사(하성 지하수 개발. 당시 전화 번호는 015- 242- 8937. 0341- 988- 8937번) 사장 김천환씨를 만나 북한 땅굴소재 등을 파악, 그 때 이미 북한 장거리 땅굴이 김포공항 지역까지 파고 내려왔다는 증거들을 입수, 확인했고, 나는 관련 증거물을 가지고(지하 댕차 지나가는 소리, 땅굴 파는 북한군의 말소리 등 녹취 테이프)이를 미국에 와서 TV방송들을 통해 보도했다.
그 때 기자에게 제보한 김천환 씨는 {내가 땅굴을 발견했다고 하자... 청와대 비서들이 나에게 찾아 와 돈 봉투를 주면서 "일체 말하지 말라.... 이것은 대통령 몫이다. 개인s 땅굴이 발표하지 밀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특히 육군 땅굴 탐사과 요원들(탐사 팀장 예병주 대령, 조승종 중령)은 나를 나를 탐사과 사무실로 초대, 관련 민간인들의 땅굴 발견사실을 부정하고 "이들이 보상금을 받기 위해 허위진술 했다.. 그들은 사기꾼이다..라고 매도했다. 심지어 탐사과 요원들은 기관총 소리를 녹음해 와서 나에게 민간인들이 녹음했다는 소리"라고 거짓 증언을 했다. 기가 찰 일이었다. 민간인들이 땅 속에서 땅굴을 파는 기계음과 지나가는 갱차 소리는 기관총 소리가 아니었다. 이들이 오늘 천안함 사태를 몰고 온 공범이다.
여하튼 그 때 육군이 "땅굴을 은폐하고 있구나 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당시 안기부는 북한의 땅굴사실들을 이미 인지했고, 심지어 북한군들이 파는 땅굴기계 중 스웨덴제 모소음, 무진동 최신 기계를 도입한 것 까지 알고 있었다.(당시 서울 세종호텔에서 나와 만났던 안기부 요원 2명이 말했다. 그러나 땅굴 전담은 안기부가 아닌 육군이었다)
현재 북한의 30년 이상 팠다는 땅굴은 서울전역을 카버했고 대전 지역까지 파고 내려 간 것으로 추론한다. 지난 2003년 경 북한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제보한 내용 중 {북한군 갱도사령부(땅굴 담당 부처 지칭)한 장성의 집안 사람이 "남조선 갱도사업은 다 끝났다"고 한다고 갱도 사령부 장성의 말을 전해 주었다.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권 당시 해군들이 훈련을 마치고 귀항하던 중 맨 나중에 따라오던 구축함(?) 한 대가 원인불명의 좌초 사태 발생은 (미주통일신문의 판단, 보도했음), 당시 북한 잠수함 부대들이 훈련하던 한국 해군의 함정 밑에서 동시 훈련을 하면서 맨 나중에귀항하는 함정을 바다 밑으로 끌어내렸던 것으로 추론. 북한의 잠수함 전력, 땅굴 위험성을과소평가할 때가 아니다.
북한 잠수정들의 동향을 파악 못하면 바다 위에 뜬 군함은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한국군은 외화내빈, 겉을 화려하게 하는 전시 쇼에 치중할 때 북한군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효과를 가져오는 전략무기를 생산, 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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