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양동안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 사건들을 보고 있으면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느낌을 털어버릴 수 없다.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있음을 알려주는 증후들로는 다음 4 가지를 들 수 있다.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첫째, 국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국회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움직이도록 하는 엔진과 같은 기관이다. 엔진이 고장 나면 자동차가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국회가 기능 정지되면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작동 불가능해진다. 우리나라 국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국회가 한·미FTA비준안 처리문제를 놓고 마비상태에 빠진 사실에서 극명하게 입증되고 있다.
국회의원들의 생각이 똑 같을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의안에 대해서든지 찬성하는 의원들과 반대하는 의원들이 나누어지기 마련이다. 국회는 국가의 중요한 문제들을 의안으로 상정하여 의안에 찬성하는 의원들과 반대하는 의원들이 토론을 통해 의견 차이를 축소하여 합의를 모색하고,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표결을 통해 다수의 지지를 받은 의견에 따라 의안을 결정하는 일을 하는 곳이다. 미국 국회에서도 한·미FTA에 대해 찬성하는 의원들과 반대하는 의원들이 나눠져 있었다. 한·미FTA에 대해 찬성하는 의원들과 반대하는 의원들로 대립하고 있었던 미국 국회는 토론과 표결을 통해 한·미FTA를 비준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회는 찬성하는 의원들이 많고 반대하는 의원들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한·미FTA를 비준하기는커녕, 토론도 표결도 못하고 있다. 동일한 상황 속에서 동일한 의안을 놓고 미국의 국회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국회는 작동불능 상태에 빠져있는 것이다. 둘째, 국민들이 감정적 기호에 따라 정치적 선택을 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20~40대 인구들이 사회상황에 대한 분노의 감정 때문에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안철수씨를 대통령 예비후보로 적극 지지하고 있는 것이라든지,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20~40대의 서울시민들이 감정적으로 몰표를 몰아주어 박원순 후보를 당선시킨 것이 그런 점을 잘 말해주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국민이 이성적일 때만 성공할 수 있는 정치체제이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주권자가 국민이기 때문이다. 주권자가 국정의 문제들을 감정적으로 판단하게 되면 그 정치체제는 성공할 수 없다. 감정적인 판단은 언제나 잘못된 판단이 되며, 주권자가 국정의 문제들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면 정치체제는 잘못된 일만 거듭하게 되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셋째,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체제에 대한 내외의 공격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반해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보호하려는 노력은 극히 미미하다. 북한 정권은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해 사상공세와 군사공세를 치열하게 전개하고 있고, 남한 내에서도 종북세력을 비롯한 좌익세력이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 정치권이나 국민들은 안팎에서 전개되는 공격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별로 전개하지 않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체제에 대한 안팎으로부터의 공격이 가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보호하려면 그것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법제적 보호장치와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지지하는 국민들의 능동적인 체제보호 노력이 있어야 한다. 분단시대의 서독은 자유민주주의체제 보호에 필요한 강력한 법률적 장치들과 국가기관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통일된 독일에서도 그러한 법제적 장치들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서독보다 훨씬 불리한 체제안보환경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독이 가지고 있던 체제 보호 법제장치들의 4분의 1에도 못 미치는 빈약한 체제 보호 법제장치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체제 보호 법제장치가 극히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서독처럼 강화하려는 노력은 전무하다. 오히려 우리나라의 유일한 체제 보호 법률인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려는 투쟁이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국민들의 능동적인 체제보호노력도 거의 없다.
넷째, 우리나라의 정치체제가 자유민주주의임을 부정하는 자들이나,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파괴하려는 자들을 ‘진보세력’으로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의 정치체제가 자유민주주의임을 부정하는 자들이나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파괴하려는 자들을 ‘진보세력’으로 부른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체제가 다른 체제로 바뀌는 것을 ‘진보’(상황이 좋게 변하는 것)로 인정하는 것과 같다.
어떤 나라에서든지 자기 나라의 정치체제를 부정·파괴하는 것을 진보, 즉 상황을 좋게 변경하는 것으로 인정해주면 그 나라의 기존 정치체제가 잘 지켜질 리 없다. 우리나라에서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을 상황이 보다 좋게 변하는 것, 즉 ‘진보’로 간주한다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체제가 붕괴되는 것을 ‘좋아지는 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국민이나 정치권이 자유민주주의체제의 부정이나 전복을 ‘좋아지는 것’으로 생각하고서도 자유민주주의체제가 유지된다면 그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사태이다. 위에서 적시한 4개의 증후들은 결코 가벼운 것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대중은 물론이고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조차도 그 증후들이 말해주는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위기상황을 언급하는 사람이 거의 전무하다. 그들의 태도에 비추어볼 때 위의 사항들이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를 알려주는 증후임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질병의 초기 증후들이 드러나도 그 질병을 인지하지 못하면, 질병이 깊어진 후에야 당황하여 호들갑을 떨게 된다. 이런 것도 한국인의 문화적 특성인가?(ko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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