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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일방독주에 반기 들었던 영웅
우리나라는 지난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를 맞으며 초고속 인터넷이 빠르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사회는 더 이상 밀실이 아닌 광장의 시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열린 공간은 컴퓨터와 인터넷에 익숙한 세대에게나 가능했다.
[뉴스파인더]시대에 주어진 변화는 사실상 통합이 아닌 분열로 가기 딱 좋은 구도로 이어졌다.
그 무렵. DJ정권과 盧정권은 10년을 이어가며 이른바 ‘좌파 인터넷 언론’을 급격히 키워갔다. 좌파정권이 이들에게 여러 몫으로 광고를 밀어준 것도 다 알만한 얘기다.
‘진보’는 청년층, ‘보수’는 노년층이라는 관념은 이때 더 강해졌다. 인터넷을 통해 모든 걸 섭취하는 청년들에게 있어 그건 당연할 결과인지도 몰랐다.
윈스터 처칠이 말했다. 젊어서 진보가 아니면 가슴이 없는 거고, 늙어서 보수가 아니면 머리가 없는 거라고. 젊은이들은 좌파언론에 동조했고 뜨거운 피는 좌파언론이 말하는 대로 미국을 상대로 잡았다.
주한 미군철수 등 반미 주장이 크게 일었고, 북한의 공작을 막아내던 국가보안법을 ‘구시대적 규제’로 해석하며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상 외부가 아닌 내부로부터 안보의식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대로 빗장이 풀어진다면 나라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나서야 했다. 우리 이 나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 보수가 할 일이었다.
2000년대 초반 보수에게 있어 불모지나 다름없던 인터넷 공간에서 당당히 맞섰던 젊은 보수가 있다. 바로 30대 청년 ‘신혜식’이다.
2000년 4·13 총선을 앞두고, PC통신에서 나눴던 정치논쟁을 빌미로 문제 삼은 경찰이 그를 대상으로 전방위적 조사를 폈다. 그 뒤 그는 ‘사이버운동가’가 되기로 결심했으며 2000년 김대중 정권에 대항하는 ‘안티DJ’ 사이트를 만든 데 이어 이듬해 3월 ‘안티참여연대’ 사이트를 개설했다. 당시 신씨는 ‘안티DJ’ 사이트에서 ‘안티천리안’과 ‘안티MBC’ 방을 따로 운영하기도 했다. 이후 ‘민주참여네티즌연대’를 결성해 국세청의 언론사 세무조사 반대 1인시위 등을 주도하기도 했다.
보수의 입장에서, 용기 있게 바른 말을 하기 위해 2002년 7월 인터넷언론 독립신문을 만들었고 나아가 2011년에는 40여개의 보수 언론사에 허브역할을 지향하는 뉴스파인더가 창간되면서 초대대표를 맡았다.
독립신문 창간 당시에 신혜식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우릴 지원하겠느냐”면서 “나혼자 남더라도 신문을 지키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크고 작은 보수단체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인터넷문화협회 사무총장, 및 한국인터넷미디어협회 회장, 자유언론인협회 부회장 국민행동본부 대변인을 역임한 바 있다.
그는 좌파가 온라인을 점령하고, 두 번의 대통령을 내며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동안 나라의 정의를 살리고, 우파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30대를 다 바쳤다.
당시 이 청년이 나라의 안보와 경제를 걱정하는 목소리는 강한 힘을 발휘했다. 우리 사회의 최고 가치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것을 널리 알리는 데 온힘을 냈다. 좌파가 판을 치던 그 인터넷 공간에서 강하게 우파의 가치를 어필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빛이었다.
국내 대표적 보수 논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좌파정권에 맞서 우익을 단합하는 데 앞장섰던 때다. 좌우를 떠나 친북, 친김정일, 북핵은 안된다며 나라 안보를 외치며 ‘반핵·반김 자유통일 국민대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우파를 총집결 시켰다는 얘기다.
김정일이 북한주민 300만명을 굶겨 죽이고 핵을 개발해 민족을 협박하고 있음에도 반미나 외치고 있는 좌파들에게 ‘당신들은 비겁하다’고 외쳐댔다. 무려 10년간 ‘북한을 자극하지 말고 이해해야 한다’고 외쳤던 좌파정권에게 반기를 들었던 흔치 않은 젊은 보수였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막기 위해 수없이 집회를 열었고, 뜨거운 목소리를 냈다. 보수를 집결시키는 이 30대 젊은 청년을 일부 언론에선 ‘젊은 영웅’이라 부르기도 했다.
안보와 시장경제를 무너뜨리려는 정권에 맞서 거의 모든 집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3.1절이나 6.25, 8.15 같은 날에 보수의 총결집을 이끌어내는 ‘반핵반김 국민대회’를 이끌기도 했고, 북한 인공기를 소각하는 시위 등으로 북한 기자와 충돌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반핵반김 국민대회’에서 폭력을 행사했다는 가당치도 않은 이유로 경찰에 구속되기도 했다. 당시 유치장에서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구속결정과 동시에 단식에 돌입, 며칠간 식사를 거부하기도 했다.
당시 행사는 국가보안법을 수호하는 취지에서 열렸고, 결국 나라의 장래를 진지하게 걱정하다 발생한 일이라고 재판부도 인정,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한편 그는 노무현 장인 권오석의 민간인학살 진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시사회에는 전임 장관들을 비롯, 경찰청 관계자, 여러 시민단체 회장단들과 관계자 등이 참석해 약 2백석의 좌석을 메웠고 일부는 서서 다큐멘터리를 관람했다.
당시 좌파언론들은 이 젊은 보수를 파악하기 위해 취재경쟁을 벌였다. 온오프라인의 모든 보수 활동의 결집. 그 이면에는 신혜식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소위 ‘민주화’가 진행되는 동안 국내 대학과 지식인 사회는 좌편향이 강했는데 최근 청년들의 보수화는 그 반작용의 성격이 강하다. 대학이 좌편향인 것 같지만 조용한 다수는 항상 우파 성향이었다. 대학교에서 우파 학생들이 더욱 큰 목소리를 내고 이들이 제대로 자리 잡게 해 사회가 좌우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본다.
그런 면에서 신혜식은 선구자다. 자신이 극우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불편해 하지 않았다. 오늘 좌우의 구도에서 우파가 좌파에 반격할 수 있었던 그 중심에 신혜식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좌파든 우파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을 것이다. 방법론의 차이였을 뿐. 하지만 절대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는 게 아닌가. 그게 바로 안보다. 신혜식의 스스로 옳았다는 믿음은 항상 거기에 있었다.
결국 좌파10년의 정권을 끝내고 보수진영에 힘을 받은 대통령이 당선됐다. 우파가 다시 세력을 찾기까지 최일선에서 뛴 것이다. 그는 여전히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안보를 따질때면 두발 벗고 나선다.
30대를 다 바치며 보수의 참 의미를 전하는 데 매진했다. 누군가가 말한대로 하얗게 다 태웠다면 후회도 없을 것이다. 안도현이 말했다. 연탄재 발로 차지 말라고,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웠던 적이 있었느냐고.
신혜식. 그는 연탄재 발로 차도 된다. 2000년 초반. 무너지는 안보를 부여잡고 고독하게 싸운 젊은 보수.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여기에 반박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
진보의 목소리가 압도적이던 인터넷에서 보수를 자처했던 사람. 그동안 ‘진보’의 일방 독주가 계속됐던 온라인에서 ‘보수의 역습’ 내지 좌편향 돼 가는 시대흐름에 국가정체성 회복이라는 ‘역반란’을 꿈꿀 수 있게 했던 첨병의 역할. 그 역할을 200% 해낸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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