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이 간첩혐의로 장 모씨 등을 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지난 10월 26일 조선일보에 보도 됐다. 그 때부터 국정원 국정원 관계자 또는 공안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하는 형태로,시민사회단체 연루설’과 386정치인 연루설’등 진실여부가 확인되지 아니한 일방적 주장과 추측들 이 유포되면서 이른바 일심회 사건은 그 파장이 확산됐다. 급기야 10월 30일 현직 국가정보기관의 수장인 김승규 국정원장이 수사가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한 사상 초유의 언론인터뷰를 통해, 이 사건을 간첩단 사건이라고 단언함으로써 파장은 더욱 커졌다.
참여연대는 수사와 재판이 끝나지 않은 상태인 만큼 사건의 진실에 대해서는 끝까지 지켜볼 것이다. 하지만 국정원의 일심회 사건’ 수사내용의 대외 유포와 이후 언론 보도 행태를 보면서, 국정원이 3개월 전 남한조선노동당 사건 진상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국민앞에 다짐했던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렸으며, 국정원이 과거의 구태를 근절하지 못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널리 알려진 바 대로, 국정원은 민간위원까지 포함하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국정원 과거진실위)를 자발적으로 구성했다. 어두운 과거사를 밝히고 반성할 것은 반성함으로써, 새로운 정보기관으로 거듭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이는 긍정적 평가를 받을 일이었다.
국정원 과거진실위가 활동한 약 2년 동안 국정원은 과거의 여러 의혹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중 가장 최근의 것이 지난 8월 1일에 발표된 1992년에 있었던 이른바 남한조선노동당 사건 이다. 당시 국정원이 민간위원들과 함께 조사한 결과, ‘남한조선노동당 사건 수사발표의 문제점은 다음 세 가지다.
첫째, 사건의 내용을 부풀렸다.
발표문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보자. 당시 안기부는 구체적인 증거가 불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김○○을 36년간 암약한 고정간첩’으로 발표하고...개별적인 3개의 사건을 기계적으로 결합시켜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이라는 단일한 사건으로 부풀려 발표했다...이와 같이 발표된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르거나 과장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언론발표문> 16쪽)
둘째, 확인되지 않은 각종 연루설로 무고한 피해자를 양산했다.
이것도 발표문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보자. 관련자 62명의 인적 사항 및 행적을 공개한 것은 이들 62명은 물론 이 사건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주변으로부터 간첩 으로 낙인찍히는 결과를 초래했다...북한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간첩’이라고도 할 수 없는 다수 관련자들의 인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평가된다(<언론발표문> 16쪽) 구체적인 혐의는 확인하지 못한 채 간첩단과 관련된 정치인에 대한 많은 단서와 첩보를 보유하고 내사 중’이라고 밝힘으로써 정치적 의혹을 부풀리다가 대선 이후로 수사결과 발표를 미뤘다(<언론발표문> 13쪽).”
셋째, 수사발표 시점과 관련한 문제다.
이것도 그대로 인용해보자. 수사결과 발표’의 시점이 대선 직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선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이나 미확인 첩보를 발표하고 이례적으로 이에 대해 대대적인 홍보활동을 편 것은 안기부가 이 사건을 정치적 목적에서 조작했다는 의혹을 불필요하게 불러 일으켰으며, 어느 면에서는 실질적으로 대통령 선거 과정에 개입한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 와 스스로 위상을 실추시켰다”(<언론발표문> 14쪽)
한 마디로 말해, 사건을 부풀리고 억울한 피해자와 희생양을 만드는 등 스스로의 위상을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같은 평가와 반성이 나온 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은 지금, 국정원이 수사하고 그 내용을 외부에 유포하고 있는 일심회 사건’은 어떠한가?
첫째,일심회 사건’도 과장되고 부풀려졌다는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김승규 국정원장이 단언한 ‘간첩단’은 커녕, 과연 간첩인지 아니면 국가보안법상의 회합통신 또는 잠입탈출죄를 범한 정도인지, 아니 그마저도 혐의 입증이 가능한 지도 논란이 많은 상황이다. 국정원 스스로도 5명의 피의자들을 간첩혐의로 구속하지 못하고, 통신회합 또는 잠입탈출 혐의로 구속하지 않았던가.
둘째,일심회 사건’에서도 무고한 피해자들을 양산하는 온갖 연루설이 난무했다.
수사과정에서 압수한 일부 피의자의 메모지, 컴퓨터 파일 등에 기록된 내용이 진위와 실행 여부 등이 확인되지도 않은 채 외부에 공개되면서 시민단체 관계자 연루설, 평택미군기지확장이전 반대 시민행동 배후설, 386 정치인 연루설, 지방자치단체 선거 개입설 등이 언론지상에 난무하였다. 결국 국정원은 수사를 통해 최종적으로 혐의를 확인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관련 사실을 유출하고, 나아가 국정원장이 직접 언론을 통해 수사중 사건을 ‘간첩단 사건’이라 규정함으로써 몇몇 보수언론과 보수인사들이 ‘소설’같은 기사와 칼럼을 쓸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이를 통해 시민사회단체는 물론이거니와 운동과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수많은 국민들의 명예를 심각히 훼손시켜버렸다.
셋째, 수사발표 시점도 문제였다.
대선이나 총선이 목전에 있는 것은 아니나, 이미 대선정국이 형성되고 있고, 북한의 핵실험 이후 대북 정책에 대한 논란과 보수세력에 의한 의도된 친북 논란이 야기되는 상황에서, 더욱이 국정원 내부에서조차 추가 수사가 필요하다며 영장 청구 및 사건 공개에 반대하는 의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장 청구가 강행되고, 특정 언론에 의해 사건이 보도된 정황을 고려할 때 국정원 일부의 정치적 고려가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통상 간첩사건이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의 경우는 사건의 특성상 치밀하게 수사하고 대부분의 증거자료를 확보한 후 피의자의 신병을 확보하거나 수사내용을 외부에 알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혀 그러하지 않았다. 과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서둘렀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같은 의심을 국정원 스스로 초래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결국 ‘일심회 사건’은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의 판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는 차원에서 사회적으로 중대한 사건의 수사내용을 수사기관 등이 일부 공개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라는 점을 충분히 확신할 수 있을만한 뒷받침이 있을 때 제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 국정원은 증거확보와 혐의사실 확정에도 상당한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진실과 추측 사이에 메꾸어야 할 간격이 넓다. 그런데도 국정원은 섣불리 미확인된 내용을 공개하고 조직의 수장이 나서서 사건의 성격을 미리 규정함으로써, 일부 보수언론들이 온갖 소설’같은 기사를 쓰게 했다.일심회 사건’에서 실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자가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이 ‘간첩’행위일지 아닐지에 대해서는 우리로서도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국정원이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은 과거의 구태를 재연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국가정보원의 과거에서 비롯된 국민들의 부정적 인식이 최근 몇 년간 상당히 완화되고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번 일로 국정원은 국민의 신뢰가 싹틀 기회를 스스로 다시 막아버렸다. 앞으로도 보수세력은 국정원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며,개혁세력은 더 이상 국정원 자체의 개혁이 가능하다는 기대를 갖지 않을 것이다.
최근 국정원 과거사진실위’는 그 활동 시한을 1년 연장키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사건의 처리를 보며 국정원이 진행하고 있는 과거사 청산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는 지 근본적인 회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정원 과거진실위의 민간위원들도 이같은 상황에서 위원회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혹 국정원에 면죄부만 주는 것은 아닌지 깊이 검토하고, 활동의 지속 여부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요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