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분권에 부정적인 사람들이 흔히 분권반대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지방재정의 허약성이나 이른바 지방 소통령(자치단체장) 및 토호들의 전횡과 비리도 문제는 문제다. 그러나 그 때문에 지방분권을 제한하거나 멈추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바로 ‘지방분권’ 안에 있기 때문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지방 소통령이든, 관료든, 토호든 그들이 일으키는 문제를 지방민 스스로가 견제하고 통제할 시스템만 만들어주면 된다. 그러한 시스템이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는 데 누가 발호하고 누가 전횡을 부린단 말인가? 그러니 국가(중앙정부)가 할 일은 그 시스템의 법률적 토대를 제공해 주는 일이다. 예컨대 현행 지방자치법에 올라와 있는 주민 투표제, 주민 소환제, 주민 조례제정 및 개폐청구제, 주민 감사청구제, 주민 소송제 등이 제대로 활성화되도록 법적 개선(법령 개정)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먼저 현재의 주민참정권은 그 발동요건을 너무나 까다롭게 규정하고 있는 점이 문제다. 가령 주민참정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주민소환제의 경우, 경기도 하남시와 서울시 강서구 강북구 등에서 주민소환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현재의 제도 아래 실제 소환이 성사되기란 (보수파 앞잡이 노릇하는 학자들이나 언론의 호들갑과는 달리)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 서울 강서구의 경우, 유권자수 40만 정도에 주민발의 6만을 목표로 한다는 주민소환추진위원회가 지난 6월 8일 개최한 구청장 규탄 집회에는 고작 40여명의 주민이 참석했다고 한다.
국회가 제정한 현행 <주민소환에 관한 법률>에 광역단체장은 10% 이상, 기초단체장 15% 이상, 지방의회의원은 20% 이상 주민의 서명을 받아야 그들에 대한 주민소환투표를 각각 청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제주를 빼고는 광역단체의 인구가 수백만에서 1천만에 이르므로 줄잡아 수십만에서 1백만에 달하는 주민의 서명을 받아야 겨우 ‘주민소환여부를 심판하는 투표를 청구’할 수 있다. 그나마 실제 소환될 지 안 될 지는 투표해 봐야 알 수 있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것마저 소환심판 대상자의 임기 시작 후와 만료 전 각 1년 동안에는 청구조차 할 수 없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것이 바로 분권반대세력들의 의지를 반영한 결과이다. 그들은 일차로 분권의 제도화 자체를 막고자 하며, 그것이 세 불리할 때는 이차로 분권제도화를 흉내만 내게 만든다. 그래서 ‘분권 해 줘봐야 변하는 게 뭐 있더냐’는 반응이 나오도록 의도적으로 ‘변죽만 울리는 분권’의 제도화를 유도하는 것이다. 바로 그 같이 ‘변죽만 울리는 분권’으로 포장된 것이 지금 한국의 지자제이다.
주민소환 법안 발의와 통과를 주도했던 민주노동당 이영순 의원은 “원래 입법제안을 할 당시에는 지금보다 좀 더 약한 요건을 둬서 주민소환제가 잘 활용되길 바랐는데 남용이나 예산과 행정력 낭비 같은 우려에 대한 주장이 너무 많았다”며 “지금의 법은 남용의 우려보다는 오히려 제대로 실행이 될 수 있을지가 걱정”이라고 말했다.
주민소환은 누구를 위해서 만든 제도인가? 주민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그 주민을 괴롭히는 권력자나 유력자, 기득권자를 보호하기 위해서인가? 만에 하나 부작용이 나타나면 그 때 도로 법령으로 보완하면 될 일 아닌가? 국회나 행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단 몇 주일로 법률이든 시행령이든 단박 고칠 수 있지 않은가? 이건 숫제 불날까 두려워 아궁이에 불 못 핀다는 얘기 아닌가? 지방 수준에서 주민참여제도가 다소 오 남용되는 부작용이 일어난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당장 숨이라도 넘어가는가? 거기서의 그러한 부작용이 그렇게 심각한 후유증이라도 남길 일인가? 아닌 말로 권력 쥔 자들이 정책상의 비리나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보다 주민참여의 활성화 때문에 일어나는 부작용이 심각하면 얼마나 심각할 것인가? 설사 좀 심각한 부작용이 있더라도 그것이 국가수준의 그것에 비한다면 극히 제한된 수준 아닌가?
다른 한편 (소환청구 시기나 서명필요 인원수에서는 주민소환 발동요건을 더욱 더 완화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소환사유’에 관한 일정의 제한은 확실히 보완해야 될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예컨대 님비 등의 사유가 개입될 때는 소환청구가 불가능하도록 함으로써 이 제도가 정말로 남용될 소지는 미리 제거해 주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이는 주민소환의 ‘실적’을 한두 건이라도 겪어본 뒤에 토론해도 늦지 않을 문제인 것 같다. 지금은 정치인이든 유권자든 일단 ‘체험’ 자체가 절실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자, 그럼 여기에서 지방자치나 지방분권을 위하여 중앙정부가 해야 할 역할을 다시 한 번 종합해 보자. 중앙의 국회와 행정각부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지금처럼 지방조례제정권을 법령으로 일일이 통제하는 입법구조, 수많은 국가위임사무와 특별지방행정기관, 또는 인사 및 재정권 등등을 잔뜩 끌어안고 있을 일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에 넘겨주고, 자신들은 그 지방자치단체와 의회를 통제하고 견제할 ‘진정한 주민참여 법령의 구축’에 몰두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오해해선 안 될 일이 있다. 지방자치, 지방자율 하자며 웬 중앙 타령이냐고? 이유는 간단하다. 현대의 헌법적 민주주의에서 지방분권은 결코 ‘분리독립’이 아니므로, 국가(중앙정부)가 법적으로 그 틀을 제도화해 주지 않는 한 지방자치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까닭이다.
물론 주민참정권을 법령으로 확장시켜 놓는다고 해서 저절로 참여가 활성화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 시스템을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일은 주민들 자신의 몫이다. 그런데 이는 지역 시민단체와 시민운동의 역할 이외에 달리 해답의 출발점을 찾을 길이 없다. 오늘날의 민주정치는 중앙이든 지방이든 각 개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전문화되고 복잡화되어 있으며, 따라서 운동적 조직과 활동으로부터 그 에너지와 리더십을 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21세기가 시민운동의 시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