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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사료발굴·분석단, 광복 63주년 맞아 발굴 포상만 280명
임정 독립유공자 이춘숙 선생, 여성독립유공자 이혜련 여사 등이다.
국가보훈처는 11일 제63주년 광복절을 맞아 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의 산파역을 맡고 신간회 총무간사 등으로 활약한 이춘숙(李春塾) 선생을 비롯해 17세의 어린나이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자결 순국한 소년 독립유공자 고덕봉(高德鳳)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의 배우자인 이혜련(李惠鍊) 여사 등 361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한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를 훈격별로 살펴보면 건국훈장 166명(독립장 2명, 애국장 59명, 애족장 105명), 건국포장 65명, 대통령 표창 130명으로 생존자는 4명이고 여성도 10명에 이른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건국훈장 8,652명(대한민국장 30명, 대통령장 93명, 독립장 797명, 애국장 3,426명, 애족장 4,306명), 건국포장 763명, 대통령표창 1,984명으로 모두 11,399명에 달하며, 외국인 포상자도 45명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의 훈장은 국내거주자는 제63주년 광복절 및 대한민국 건국 60년 중앙경축식장과 지방자치단체에서 실시되는 경축식장에서, 국외거주자는 재외공관을 통해 본인과 유족에게 전수된다. 유족이 확인되지 않는 분의 훈장은 정부에서 보관하였다가 '훈장 찾아주기 운동' 전개 등을 통해 유족이 확인되면 전수하게 된다.
전체 포상자 361명 중 정부가 발굴 포상하게 되는 280명(78%)은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당시의 판결문, 각 읍·면·동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수형인 명부, 그리고 신문보도 기사와 현지조사 등을 통하여 자료를 직접 찾아 포상하게 됐다.
이번 제63주년 광복절 계기 포상은 역사학 전공자로 구성된 국가보훈처 전문사료발굴·분석단이 3,026건의 독립유공 심사대상자에 대해 자료를 분석하고 보완하여 이들 가운데 독립운동 공적이 확인된 709건에 대해 독립유공자서훈공적심사위원회의 3개 분과별 위원회와 제2심사위원회, 합동심사위원회 등 총 17차례의 심도 있는 심사를 거쳐 이루어졌다.
전문사료발굴·분석단에서는 판결문, 수형인명부 등의 행형자료 5,549건, 중국의 당안자료인토죄봉성집안현관공리문서(討罪奉省輯安縣官公吏文書), 대만에서 수집한 일병입경혼춘현경내피해간민휼금핵정서(日兵入境琿春縣境內被害墾民?金核定書)등의 해외자료, 독립신문, 매일신보 등의 신문자료, 일제의 의병 탄압자료인 폭도에 관한 편책 등 국내외의 다양한 자료를 수집·분석했다. 이를 통해 독립군 활동 중 전사 순국한 사실이 확인된 이태섭 선생 등 23명의 공적을 새롭게 발굴, 포상한다.
또한 의용단원으로 활동한 이휘환 선생 등 38명은 종래 수형여부 등 입증자료가 불충분하여 포상이 보류되어 왔으나 금번 자료 발굴을 통해 입증자료가 보완됨으로써 포상하게 되었다. 동일인 여부가 불분명하였던 박원경 선생은 경찰청에 지문감식을 의뢰하여 동일인임이 확인됨으로써 애족장에 서훈된 경우이다. 그 외에도 석창건 선생은 현지조사와 자료보완을 통해 자료상의 인물과 동일인임이 확인되어 애족장에 서훈하게 됐다.
특히, 이번 발굴포상자 280명 가운데 119명은 판결문 등의 공적 입증자료를 발굴한 후 다시 시(구)·읍·면·동사무소의 협조를 받아 제적등본, 주민등록등본 등을 역 추적하여 후손을 일일이 확인하여 포상함으로써 보훈행정의 신뢰를 제고함은 물론 독립유공자의 명예선양과 후손들이 자긍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앞으로도 국가보훈처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은 국가가 끝까지 책임진다는 국가 무한책임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전문사료발굴·분석단의 역량을 집중하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등 독립운동사료 소장기관과 협조해 독립유공자 발굴 작업을 적극 확대 해 나갈 계획이다.
이번에 포상을 받는 분 중 주요훈격이 추서된 분들의 공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는분 2명
故 유기석(柳基石, 1907-미상)선생은 1928년 중국 상해에서 재중국조선인무정부주의연맹을 결성했고, 1930년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활동했다. 1932년 이후 북경으로 가서 동북의용군 등의 항일단체에 가입하여 천진일본총영사관 및 일본기선에 수류탄을 투척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33년 7월 상해에서 반일만(反日滿)의 의열투쟁을 목적으로 중한호조연합회를 결성했고, 1938년 김구 선생과 협력하여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실추시키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1943~1945년에는 남경에서 한족동맹의장 겸 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 대장으로 초모활동도 펼쳤다.
故 이춘숙(李春塾, 1889-1935)선생은 1919년 3·1운동 직후 국내와 중국 상해, 노령을 오가며 임시정부 수립운동에 참여한 뒤, 그해 4월 상해로 망명하여 1920년 4월까지 임시의정원 의원·부의장, 임정 군부차장·학무차장 등을 역임하면서 임시정부의 헌법개정, 국채통칙, 공채발행조례 등의 제정에 참여하는 한편, 1919년 11월경 독립대, 1920년 11월 상해민단장 여운형 선생이 발기한 신한문화동맹 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1920년 11월경 일경에 체포된 후 국내로 압송되어 징역 5년을 받고 출소하였으며, 이후 1927년부터 1931년 5월 신간회 해소까지 경성지회의 총무간사, 동 회 중앙집행위원·중앙상무위원·조사부장 등으로 활동했다.
생존해 계신 독립유공자는 4명
건국포장을 서훈 받는 이연형(李連珩, 1921년생)선생은 1941년 7월 인천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고, 대통령표창을 서훈 받는 서연철(徐演喆, 1926년생)선생은 1944년 경북 안동에서 비밀결사 조선회복연구단(朝鮮回復硏究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금복(李今福, 1912년생) 여사는 1934\-1938년 부산과 삼천포에서 항일 농민조합 활동으로 체포되어 8개월의 옥고를, 정성장(鄭聖璋, 1923년생) 선생은 1944년 7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재학 중 조선민족해방협동당에 가입하여 당원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7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여성독립유공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는 故 이혜련(李惠鍊, 1884-1969)여사와 故 조마리아(趙마리아, 未詳~1927)여사는 독립운동 명문 家의 가족으로서 독립운동을 몸소 실천하신 분들이다.
이혜련 여사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으로 1909년부터 독립운동단체에 지속적인 독립운동 자금지원과 1919년 미국 L.A에서 조직된 부인친애회, 대한여자애국단에서 활동했다.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 의사의 모친으로 안 의사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고, 1907년에 국채보상의연금을 기부하고 1926년에는 상해재류동포정부경제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직접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또한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는 故 정막래(丁幕來, 1899-1976) 여사와 故 이소선(李小先, 1900~未詳) 여사는 기생으로서 1919년 경남 통영군 통영면 기생조합에서 동료들과 함께 기생단을 조직하여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각각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는 故 고덕봉(高德鳳, 1903-1920) 선생은 17세의 어린나이로 중국 용정에서 독립신문배부 등의 활동을 하다가 러시아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던 포부가 좌절되자 1920년 4월에 자결 순국했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는 故 신창희(申昌熙, 1877-1926)선생과 건국포장을 추서 받는 故 박서양(朴瑞陽, 1887-1940) 선생은 제중원(당시 세브란스병원 의학교, 연세대학 의과대학)을 1회로 졸업한 한국 최초의 의사로서 중국으로 건너가 각기 임시정부와 간도국민회 군의(軍醫)로 활약하는 등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고, 교민들에 대한 의료 활동과 조선인 교육운동을 펼쳤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는 故 이규준(李圭駿, 1897~1928 독립유공자 이석영 선생의 장남)선생과 건국포장을 추서 받는 故 이규창(李圭昶, 1889-1963 독립유공자 이시영 선생의 장남) 선생은 부모의 뜻을 이어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촌형제지간으로서, 이규준 선생은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삼촌인 임정 재무차장 이시영의 지시로 1920년 음력 8월 국내로 들어와 충남 홍성에서 독립자금을 모집하다 同年 6월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규창 선생은 중국 남만주의 신흥강습소 제1회 특기생으로 1913년 이후 신흥무관학교 학감 후임 및 군사과 교무, 교사 등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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