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희(李晳熙) 전 KBS 보도국장
요즘 식자층과 분별력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방송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심한 경우는 방송이 국가 사회적으로 끼치는 해악과 부작용을 바로 잡지 않고는 우리의 미래가 걱정스럽다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오래전부터 드라마를 비롯한 연예 오락 프로그램의 부도덕 퇴폐 저질성과 방송의 지나친 상업주의적 행태가 역기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김대중에서 노무현으로 이어진 좌파정권 10년 동안 프로그램의 부도덕성과 퇴폐 저질성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시사교양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방송이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국가안보까지 통째로 흔드는 일도 서슴치 않게 된 것이다. 방송이 이래도 되는가?
방송의 시설 장비 시스템은 최첨단 최고로 갗추어 놓고, PD 기자 아나운서 등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의 허우대나 능력은 어디 내놓아도 빠질 것이 없을 것 같은데 무엇이 잘못돼서 그 지경이 됐을까? 그것은 결국 겉으로 보이는 껍데기의 문제가 아니라 속을 채우고 있는 알맹이의 문제라고 볼 수밖에 없다.
껍데기가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그 속에 들어있는 알맹이가 골았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물 좋고 학벌 좋고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생각이 비뚤어졌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시설장비가 최첨단이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의 허우대가 멀쩡해 보인다 하더라도 정신세계가 저급하고 망령된 혼(魂)의 지배를 받는다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일요일도 공휴일도 없이 프로그램 제작에 혼신을 기우리던 PD들이 있었다. 사흘이 멀다하고 전화기가 놓여있는 책상 위에서 새우잠을 자며 뉴스를 지키는 기자들이 있었다. 방송의시설 장비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지만 봉급도 얼마 되지 않았고 별도의 근무수당이라는 것은 얘기도 들어보지 못했던 시절이다.
그처럼 열악한 제작여건 속에서도 당시 PD와 기자들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하고 그 속에 모든 역량과 혼을 넣기 위해 침식을 잊고 몰두했다. 부실한 장비로 프로그램을 제작하다보니 일의 품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제 때에 먹고 자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고 처우가 문제가 아니었다. 오로지 프로그램을 잘 만들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권위주의 시대의 방송이 그러했다. 국가안보 경제발전 사회안정을 통치의 기본으로 삼고 안보 경제 사회의 기틀을 흔드는 행위를 엄단하던 시대를 우리는 흔히 권위주의 시대라고 한다. 물론 그 때의 방송은 정부가 의도하는 안보 경제 사회 안정을 위한 프로그램에 동원됐던 것도 사실이다.
억대의 연봉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지금의 영악한 방송 후배들이 생각하기에는 그것을 권력의 방송 장악이었다고 폄훼(貶毁)하고 타매(唾罵)할런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방송이 국가안보 경제발전 사회안정에 힘을 보태는 방향으로 이바지했던 것이 사실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는 그때대로, 좌파정권이 들어서자 철저히 좌파 중심으로 기울었던 방송에 대해 ‘방송은 권력의 나팔수’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어느 면에서 옳은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말대로라면 과거의 방송은 국가발전을 위해 북치고 장구친 국가진운(國家進運)의 나팔수였고, 오늘날의 방송은 나라를 망치는 일에 뛰어들어 덩달아 꽹과리치고 춤추는 국가장송(國家葬送)의 나팔수인 셈이다.
무엇이 그들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첫째는 방송의 영향력과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오히려 이를 악용하려는 조직적인세력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은 치밀한 사전 계획 아래 방송의 막강한 전파력(傳播力)을 이용해 국론을 분열시키고 공산화 혁명공작에 앞장선 진짜 빨갱이들이다. 좌파 정권을 거치는 동안 방송을 통한 그들의 활약과 실적은 도드라지게 드러났지만 여전히 자기들의 의도와 모습은 숨긴채 어리석은 자들을 부추키고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
둘째는 인권이니, 민족이니, 방송의 민주화니, 보도의 공정성이니 하는 그럴듯한 명분에 휩쓸려 조직 세력의 공작에 이용을 당하는 경우이다. 그들은 지금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잘못이 언제 제 발등을 찍는 일이 될 것인지, 나라 망해 먹을 일인지 조차 모르고, 조종을 당하면서도 날뛰는 얼치기 들이다.
그 얼치기들은 국법 질서를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나라를 송두리째 뒤흔들려는 반국가적 반사회적 데모대와 불법을 다스릴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 공권력을 똑같이 1;1로 보는 바보들이다. 심지어 불법과 폭력을 저지르는 과격분자들이 전경을 붙잡아 옷을 홀딱 벗기고 뭇매질을 가해도, 데모대가 폭도로 변하여 경찰차를 때려 부수고 경찰관을 집단 공격해도, 그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경찰이 데모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데모대를 구타했다느니 인권을 유린했다느니...하는 식으로 도치(倒置)된 시각으로 왜곡하기 일쑤였다.
셋째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몇 사람의 우익논객을 제외하면 국가의 지도자든 영향력 있는 원로든 정치인이든 국가관과 시국관이 두렷하고 용기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수도 서울 한 복판에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해방구가 생겨도, 경찰관이 데모대에게 끌려가 매를 맞아도, 경찰 버스를 때려 부수고 경찰이 장비를 빼앗겨도 나서서 말하는 사람 하나 없는 ‘小人輩들의 난장이 나라’가 돼 버린 느낌이다. 오히려 그들의 비위를 맞추고 부추겨서 정치적 이득이나 노리는 패거리들이 날뛰는 세상이니 나라꼴이 되겠는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른 것은 그르다’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하는 용기있는 사람, 어른다운 어른이 없는 사회라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지난 1970년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던 학생들의 과격 시위를 진정시키는 과정에서 경찰저지선(police line)을 뚫고 과격 시위를 벌이던 대학생이 7명이나 사살된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 사건으로 미국 전역이 초상집 같았지만 당시 미국의 신문방송, 여야 정치인, 법조계, 시민들은 “학생들의 무분별한 행동과 과격 시위가 비극을 불러왔다는 점을 교훈으로 삼아야한다”는 방향으로 모든 사람들이 법질서의 편에 섬으로써 사태를 진정시켰다. 미래를 향한 큰 흐름을 놓고 볼 때 눈앞의 비극과 아픔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는 미국 사회의 성숙성과 저력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우리도 이제 길게 앞을 내다보고 오늘의 좌표와 방향을 가다듬을 수 있도록 성숙해져야 할 때다.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방송신문, 여야 정치인, 법조계, 지식인들의 깨달음이 중요하다.
특히 가장 영향력 있고 파급 효과가 큰 방송을 망국적 의도를 숨기고 있는 공작원이나 그 들의 조종을 받으면서도 뭐가 뭔지도 모르고 날뛰는 얼치기들에게 맡겨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런 뜻에서 무엇보다 먼저 방송이 분별력 있고 성숙한 교양인이 지배하는 믿을 수 있는 매체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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