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왕비는 침전이 구분되어 있었고 아기를 수태(受胎)할 길일을 받고 하늘과 땅의 만남을 상징하는 합궁(合宮)을 하였으며 한달에 한번인 길일은 제조상궁,관상감에서 초하루 그믐 보름 뱀날 호랑이날을 피해 택하여 올리며 길일이라도 일기가 안좋으면 역시 피했고 합궁하는 날에는 나이 많은 상궁 2 명만 침소를 지켰다.
태교는 성현의 교훈을 새긴 옥판을 보고 그 말씀을 외우는 것으로 아침을 맞이하였으며 임신 3개월부터 어지러운 바깥 세상과 소식을 끊고,심지어 왕과도 편지로 연락하며 음식의 단맛도 경계하고 피리 독주도 피했고 처소에는 늘 정숙을 유지해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몸치장에 신경을 썼다.
5개월부터 낮에는 당직 내시,밤에는 상궁나인이 천자문,동몽선습,명심보감 등을 낭독하고 7개월부터는 육선(肉膳)을 피하고,콩으로 만든 음식,각종 채소와 해산물이 상에 오르게 되며,산모는 불로장생하는 생물과 자연물을 그린 십장생 병풍을 보며 자수와 누비옷을 만들며 마음을 안정시키고 왕자가 태어나기를 기원했다.
왕비와 세자빈의 출산을 위한 산실청(産室廳)과 후궁을 위한 호산청(護産廳)을 두었는데 산실청은 중전의 경우 3개월 전에 설치하며,산실청 설치 기간에는 형벌 집행을 하지 않고 출산 후 7일째 되는 날 산실청을 폐지하였다.산실청은 출산과정을 총괄할 도제조와 권초관을 임명하고 내의원의 3제조 등이 배속된다.
산기가 있으면 산실청에서 산실을 꾸미는데 산실은 산모의 안정을 위해 평소 거처하던 방으로 정했으며 순조로운 출산을 위하여 최생부(催生符)를 북쪽 벽에 붙였다.산자리를 깐 후에는 태의를 둘 방향에 주사로 쓴 부적을 붙인 후 의관 차지내관이 순산할 자리를 귀신에게 빌리는 차지법(借地法)으로 귀신들이 악신을 물리칠 것을 부탁했다.
의관은 왕의 윤허(允許)를 얻어 왕비의 성을 부르며 왕손의 출생이지만 귀신에게 도움을 얻어야 했다.달이 바뀌면 길한 방향이 바뀌기 때문에 산자리를 달의 덕을 볼 수 있는 길한 방향으로 돌려놓았다.산자리는 산모의 머리가 달이 떠오르는 방향을 향하도록 설치하였다.산기가 있으면 산실에 삼신상을 차려놓고 순산을 빌었다.
왕비가 출산하면 국왕은 구리종을 쳐서 아기의 출생을 알리고,출산 직후에 산실청에서 권초(捲草)를 하고 벽에 붙여둔 최생부를 떼어 불살랐다.원자가 탄생한 지 3일째 되는 날 국왕은 종묘에서 선대 왕들에게 소식을 알렸다. 7일째 되는 날 왕은 대신들의 축하 인사를 받고 축하 연회를 성대하게 베푸는 진하(進賀)를 거행했다.
조선 왕실은 아기가 태어나면 태를 작은 백자로 된 내호(內壺)에 넣어 산실(産室)안에 길한 방향으로 보관하여 두었다.내호는 태 안 항아리,내항(內缸)이라고도 하며 외호에 비하여 홀쭉하게 생겼다.길일을 택하여 태를 보다 큰 항아리인 외호(外壺)에 넣어 밀봉하였다.외호는 태 밖 항아리,태호(胎壺),태항(胎缸),외항(外缸)이라고도 부른다.
헌 동전 하나를 글자가 적힌 부분이 위가 되게 작은 내호 바닥 중앙에 깔고 여러 번 씻은 태를 그 위에 넣고 기름 종이와 남색 비단으로 항아리 입구를 덮고 빨간 끈으로 밀봉하여 더 큰 외호에 담는다.항아리 사이를 내호와 외호가 움직이지 않도록 솜으로 채워 고정시킨 후 습기가 스며들지 못하도록 기름종이로 싼 후 마개와 뚜껑을 닫아 막는다.
왕자가 출생하면 태실도감(胎室都監)을 설치하고 길일(吉日)·길지(吉地)를 택하여 안태사(安胎使)를 보내 태를 묻었으며 태실(胎室)은 대석(臺石)·전석(磚石)·우상석(遇裳石)·개첨석(蓋檐石)으로 구성되었다.관찰사(觀察使)가 왕·왕비·왕세자(王世子)의 태실을 살피게 하였으며 대왕태실의 경계는 300보(步)로 하고 일반인의 출입을 금했다.
왕릉은 도성 4대문 100리 안에 조성되었지만 태실은 왕실과 백성간의 유대감을 강화하려는 통치 이데올로기로 전국의 명당을 찾아 조성되어 왕실은 중국과 일본에도 없는 태실의 관리에 정성을 기울였다.태실로 정해진 명당들은 거의 무쇠솥을 엎어 놓은 형상,혹은 바다 위에 거북이가 떠있는 형상인 돌혈(乭穴)에 속한다.
경기 남양주,광주,연천,포천,가평,강원 원주,영월,경북 영천,김천,울진,구미,상주,예천,성주,경남 마산,양산,사천,하동,부산,충북 충주,청원,충남 서산,보은,금산,홍성,부여,공주,전북 완주,광주 등 명당을 찾아 반드시 들판 가운데 둥근 봉우리를 선택하여 그 위에 태를 묻고 태봉(胎封)이라 하였고 농사를 짓거나 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했다.
왕과 왕자,공주 모두 태봉이 있으며 왕실에서 왕족의 태를 전국의 명당을 찾아 묻은 것은 태를 좋은 땅에 묻어 좋은 기를 받으면 그 왕족이 무병장수하여 왕위의 무궁한 계승에 기여할 것이라는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에 따른 것으로 사대부들의 명당을 빼앗아 태실을 만들어서 왕실에 위협적인 인물의 배출을 막으려 했다.
아기를 임신한 비빈(妃嬪)은 빛깔이 아름다운 옥과 자수정을 가까이 했으며 가야금과 거문고 소리,천자문,명심보감을 태아에게 들려주었고 정서 안정과 집중력 향상을 위해 바느질을 하였고 단백질 보충을 위해 콩으로 만든 음식을 많이 먹었다.
원자의 양육을 담당한 보양청(輔養廳)과 강학청(講學廳)은 천자문,동몽선습,대학,격몽요결 등의 경서 학습과 원자의 음식,옷,서책의 공급을 관장하였고 머리가 맑아지는 조청,피로를 풀어주는 소금 목욕 등 학습 능률을 올리기 위한 보양에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원자(元子)는 아침에는 왕실 어른께 문안드리고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피며 격식에 맞는 옷차림과 정숙한 태도로 생활해야 했고 통과의례(通過儀禮)와 국가 행사에 참여하여 장차 국왕이 되어 의식을 주관할 때 필요한 몸가짐을 익히기도 했다.
원자가 세자(世子)로 책봉되면, 세자시강원이 설치되어 본격적인 제왕 수업을 시작하였는데 시강원(侍講院)의 교재는 효경이나 소학을 쉽게 풀어 쓴 효경소학초해나 역대 국왕의 행적 가운데 모범이 되는 사례를 모은 조감,자성편 처럼 특별히 왕세자의 교육을 위해 편찬된 책이다.
국왕과 세자는 신료와 군사들을 이끌고 사냥을 나가는 강무(講武)를 시행하였으며 평소에는 활쏘기와 말타기로 체력을 다졌다.친히 밭을 가는 친경례와 누에를 치는 친잠례는 궁중에서만 생활하는 왕세자에게 백성들의 생활을 일깨워 주었다.
한국디지털뉴스 김민수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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