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수 칼럼니스트
조선 왕실의 이동 수단인 가마는 주로 조회,연회와 제향(祭享), 능행(陵行) 등 국가의례를 거행하기 위해 궐 밖으로 행차할 때 사용되었는데 가마는 군병의 호위를 받는 어가(御駕) 행렬에서 다양한 의장(儀仗)과 문무백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왕과 왕비, 왕세자는 연(輦)을 탔고, 공주와 옹주는 덩[德應]이라 부르는 가마를 탔다. 지붕과 벽체가 없는 가마인 남여(藍輿)는 국왕이 궁에서 이동할 때 사용되었다. 대한제국시대는 봉교(鳳轎)가 새롭게 등장하여 황실에서 쓰였다.
또, 향로와 축판(祝板)을 싣는 향정자(香亭子), 국가의 중요한 행사 때 관료들이 올리는 전문(箋文)·치사(致詞)를 싣는 용정자(龍亭子), 국가 행사 때 올리는 옥책(玉冊)·교명(敎命)이나 선왕의 업적을 담은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싣는 요여(腰輿), 의식에 사용하는 보(寶)나 임금이 하사한 명복(命服)을 싣는 채여(彩輿)와 같이 의물(儀物)을 운송하는 가마도 있다.
조선 국왕이 탔던 연(輦)은 지붕, 몸체, 가마채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서리에 용을 그린 둥근 기둥을 세우고 둥근 기둥 사이에 각기둥을 세운 후 아랫부분에만 난간을 돌렸다. 몸체에 주칠(朱漆)을 한 후 난간 부분에 금색으로 백택(白澤), 기린(麒麟) 등 다양한 상상의 동물들을 그려 넣었다.
네 면에 주렴(珠簾)을 드리우고 다시 휘장(揮帳)을 내려 열고 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지붕 네 모서리 봉황 장식에 고리를 달아 유소(流蘇)를 고정시켜 내려뜨렸으며 가마채의 끝 부분에는 도금한 용머리 장식을 끼워 마감했다.
대한제국 황실이 사용한 봉교(鳳轎)는 지붕과 출입문을 비롯한 가마의 네 측면을 봉황(鳳凰)으로 장식하였고 길이를 짧게 한 붉은 색 휘장에도 봉황을 금박하였다.지붕은 두 단을 지어 올렸고 팔각의 단을 이룬 정상을 8마리의 봉황을 두른 호리병 모양 꼭지로 마무리했다.
지붕의 각 면에는 구름문양을 그렸고 네 모서리의 봉황 장식에서 유소(流蘇)가 내려져 있다. 내부에는 주칠(朱漆)을 한 의자를 설치했다. 가마채는 별도의 고리를 만들어 고정하여 매도록 하였는데 끝 부분은 용머리로 장식했다.
1903년 어극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칭경식(稱慶式)'을 전통예술극장인 광무대(光武臺)에서 열었으며,대한국(大韓國) 고종황제는 경운궁부터 광무대까지 행사 이동시 사용할 포드 또는 캐딜락 승용차 1대를 칭경식(稱慶式) 의전용 어차(御車)로 수입을 지시했다.
궁내부는 알렌 미국 공사를 통하여 샌프란시스코의 자동차 판매상 프레이저'로부터 포드의 A형 4인승 무개차 1대를 수입하였다. 알렌 미국 공사는 1884년 대한국에 와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며,최초의 서양 병원인 광혜원을 세워 신임을 받고 고종 황제의 주치의를 지냈다.
인천항에서 하역하고 1899년 개통한 경인선 철도를 이용하여 1902년 개통한 한강철교를 건너 남대문역에서 내려서 경운궁까지 가야 했으므로 칭경식이 끝난 후에 도착하고 황제의 행차는 위엄이 있어야 하는데,차가 시끄럽게 소리나고 빨리 달려 황제 행차에 사용하지 못했다.
1908년 황실용으로 수입되었던 2 대의 차가 최초의 어차가 되었는데 한 대는 고종황제용 영국제 흑색 다임러 리무진이고,다른 한 대는 순종황제용 프랑스제 적색 르노 리무진이었다. 1910년 한 대를 더 수입한 차가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캐딜락 리무진이다.
고종황제가 어차를 타고 행차했다거나 일반인들이 행차 장면을 목격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경술늑약(庚戌勒約) 이후인 1911년부터 순종황제는 캐딜락 리무진을,순정황후가 영국제 다임러 리무진을 탔으며,의친왕(義親王) 이강 공은 미국제 오버랜드를 애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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