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수 칼럼니스트
단군(檀君) 이래로 강토가 나뉘어 서로 웅(雄)함을 다투다가 고려(高麗)에 이르러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하였다.나라는 옛 나라이나 천명(天命)을 새로 받았으니 이제 이름을 새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며 삼한(三韓)을 아우르는 것이니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대한국(大韓國)을 국호로 한다.북으로 말갈(靺鞨:간도)이 상아와 가죽을 생산하고,남으로 탐라(耽羅國:제주도)가 귤과 해산물을 공(貢)하였다.대한국 고종황제는 제주에서 간도까지 남북으로 4천리에 일통(一統)의 업(業)을 세우시었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에 백악(북악산)과 목멱(남산) 사이의 경운궁 대안문 앞 환구단에서 천지(天地)에 제(祭)를 올리고 황제에 즉위하며 천하에 호(號)를 정하여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는다고 천명하였다.1899년 8월 17일 반포된 대한국 최초의 헌법의 명칭은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였으며 대한국 국제(大韓國 國制)는 총 9조로 구성되어 있으며,대한국 황제의 육해군 통수권,계엄령 발포권,법률 제정·반포권,문·무관 임명권,조약 체결·선전·강화권 등을 규정하고 있다.
대한국(大韓國)은 고종황제가 한반도 간도 녹둔도 제주도 대마도 동해 독도를 비롯한 인접 도서,해양을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애국가를 상징으로 한 제국으로서 1897년 경운궁으로 이어한 고종은 자주 독립을 대내외에 널리 표명하기 위하여 10월 12일 환구단에서 대한국을 선포하고 광무황제로 즉위하였는데 고종황제는 오전 2시 환구단에 나아가 천신(天神) 황천상제(皇天上帝)와 지신(地神) 황지지(皇地祗)에 고하는 환구대제를 봉행한 뒤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 의자에 앉아 12장 곤면(袞冕)을 입고 새보(璽寶)를 받았다.
1882년 5월 22일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에 태극 문양을 흰색 바탕에 빨강과 파랑으로 그려 넣은 태극도형기(太極圖形旗)를 임시 국기로 사용한 후 국기 제정의 필요성을 느낀 김홍집은 태극도형기에 8괘(卦)를 첨가하여 태극과 8괘 도안의 기를 만들었다.1882년 9월 박영효는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태극과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 도안의 기를 만들었다.고종은 1883년 3월 6일 어명으로 이 태극과 4괘 도안의 태극기(太極旗)를 국기(國旗)로 제정·공포하였다.
광무 원년 경운궁 대안문 앞에 제천단을 축조하고 이름을 환구단 또는 황단(皇壇)이라고도 하는데,역군과 장색 천여 명이 한달이 못 되어 다 건축을 하였는데 단이 삼층이었다.1층은 장광이 영 척으로 144 척이며 둥글게 돌로 쌓아 석 자 높이로 쌓았고, 2층은 장광이 72 척이며 석자 높이로 쌓았고, 3층은 장광이 36척이며 석자 높이로 둥글게 쌓아 올렸고,바닥은 벽돌을 깔고 황단 주위를 둥글게 석축을 모으고 돌과 벽돌로 담을 쌓았으며,동서남북으로 황살문을 세웠고 남문은 문이 셋이다.
경운궁 대안문부터 환구단까지 좌우로 군사들을 질서정연하게 배치하고 황색 의장으로 호위하였는데 시위대 군사들이 어가를 호위하였으며 어가 앞에는 대황제의 태극국기가 먼저 지나갔고 대황제는 황룡포에 통천관을 쓰고 금으로 채색한 연을 탔고 그 뒤에 황태자가 홍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쓴 채 붉은 연을 타고 지나갔으며 1897년 10월 12일 환구단에서 환구대제를 봉행하고 대한국을 선포한 후 경운궁으로 이어한 고종황제는 태극전에서 백관의 축하를 받고 낮 12시에 명성황후를 추존하고 2시에 순종을 황태자를 책봉하였다.
1873년 친정(親政)을 시작하고 1887년 최초로 전등 점화하여 전기를 사용한 건청궁에서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한 고종은 대안문(大安門) 앞 환구단에서 자주 독립을 천명하고 대한국(大韓國)을 건국하였으며 한반도 간도 제주도 독도 대마도 녹둔도를 아우르는 4천리 영토를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와 애국가를 제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한광복(光復)운동을 적극 지원한 고종황제를 고액권 화폐 도안 인물로 선정하고 경운궁 앞 태평로를 고종로로 개칭하여야 하며 황토현의 기념비전 앞에 고종황제 동상을 건립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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