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尹奉吉)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출생했으며 농촌 계몽과 부흥운동 및 독서회운동을 했고, 한시 300여 편을 써서 책으로 엮어‘명추(嗚推)·옥타(玉睡)·임추(壬椎)’ 등의 제목을 붙여 작품집을 만들었다.
20세에‘농민독본’3권을 저술해 농촌 계몽과 부흥운동의 교재로 활용했으며 21세에 부흥원(復興院)을 설립, 기념 우화인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고 월례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기사년(己巳年) 일기(日記)’를 쓰고, 위친계(爲親契)와 월진회(月進會)와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조직했다.
윤봉길 의사는 김태식(金泰植)과 한일진(韓一眞)과 함께 대한광복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1930년 10월 간도 독립군 기지를 물색하였고 1931년 청도에서 상해로 건너가 안공근(安恭根)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고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한인공우회를 조직하고 노동야학과 노동환경개선운동을 전개했다.
윤봉길 의사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을 찾아가 김구(金九), 이유필(李裕弼), 최동오(崔東旿), 김현구(金鉉九), 김의한(金毅漢), 김두봉(金枓奉), 박창세(朴昌世), 안공근(安恭根)과 대한광복운동을 펼쳤다.
윤봉길 의사는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조소앙(趙素昻)과 상해 거류민단 사무실에서 대한광복운동을 하다가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 선서식’을 거행하고 4월 29일 상해 홍커우공원 의거를 일으켜 세계 만방에 한민족의 대한 광복 의지를 알렸다.
윤봉길 의사는 일본의 천장절(天長節),전승기념 축하식 단상에 수통형 폭탄을 투척해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과 상하이 거류민 단장 가와바다를 즉사시키고, 일본 3함대 사령관 노무라·9사단장 우에다·주중 일본 공사 시케미쓰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5월 28일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32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되어 11월 20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됐으며 1932년 12월 18일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감되어 1932년 12월 19일 25세를 일기로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시 육군 공병작업장에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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