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화비(斥和碑)는 조선 후기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승리로 이끈 흥선헌의대원왕이 서양세력을 배척하고 이를 온 백성에게 일깨워 주고자 전국의 주요 지역에 세우도록 한 비이며 고조 8년(1871) 전국 각지에 세웠다가 임오군란(1882)으로 흥선헌의대원왕이 청나라에 납치되고 이어 개항을 맞게 되자 대부분이 철거되고 몇 기의 비들만 곳곳에 남아 있다.
척화비는 네모나게 깎은 돌의 모서리를 자른 간단한 형태이며 굵은 글씨로 “서양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이니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내용을 적어 놓았다. 그 옆에 “자손만대에 경고한다.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운다.”라는 작은 글씨를 새겼다.
장충단비(奬忠壇碑)는 장충단에 서 있던 비이고 장충단(奬忠壇)은 고조 32년(1895)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일본군을 물리치다 순국한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 영관 염도희(廉道希), 영관 이경호(李璟鎬)을 제향하는 제단이다.광무 4년(1900)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의 명에 의해 장충단을 지을 때 비도 함께 세워 놓았다.
장충단비는 반듯한 사각 받침돌 위로 비신을 세운 간결한 구조이며 앞면에는 장충단(奬忠檀)’이라는 비의 명칭이 적혀 있는데, 대한제국 2대 순종 융희제가 황태자 시절에 쓴 글씨이고 뒷면에는 민영환(閔泳煥)이 쓴 비문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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