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대중가요의 한 구절 같은 느낌을 주는 아침을 여는 소리 즉 단성(旦聲)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예능보유자인 이춘희선생님의 호이다.

아침을 여는 소리
대중가수를 연상케 하는 단성 이춘희선생님은 서울 한남동에서 태어나서 젊은 시절을 한남동 일대에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요를 부르는 것을 좋아해서 한때는 가요학원을 다니면서 최숙자씨의 음반에 '백령도 처녀'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가요를 부르대면 신은 낳지만 가슴 한 켜에는 무엇인가 응어리가 진듯 답답함이 맴돌고 자신이 부르고 싶은 것이 대중가요가 아니라 국악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발품을 팔아서 수서문한 곳이 바로 당대 최고의 성악학원인 청구고전성악학원이 였다. 만난 사람이 바로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타령 故이창배명창이다. 그 이후 정득만 선생님에게 현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후보 김혜란 등과 함께 경기소리를 배웠다.
이창배 선생 문하에서 10년 동안 공부를 했다. 처음 이창배 선생님을 뵐 때는 한 3개월이면 다 배우겠다 라고 생각을 했다. 경기민요가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이창배 선생님에게 10년을 배우고도 부족하여 안비취 선생님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1975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안비취 선생은 그녀의 스승이면서 어머니였다. 소리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여자의 품행에 대해 가르쳤고, 여자가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경기민요란 서울과 경기도지방에서 전승되는 민요이지만, 여기서의 경기민요는 경기긴잡가를 가리킨다. 잡가는 가곡이나 가사와 같은 정가(正歌)와 대비되는 속가(俗歌)라는 뜻으로 쓰였으나, 오늘날에는 속가 중에서도 긴형식의 노래를 앉아서 부르는 것을 잡가라 한다. 경기잡가 가운데 느린 장단으로 된 12잡가를 긴잡가라 부른다.
경기긴잡가는 유산가, 적벽가, 제비가, 소춘향가, 선유가, 집장가, 형장가, 평양가, 십장가, 출인가, 방물가, 달거리 등 12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산가는 산천경치를 노래한 것이고, 소춘향가, 집장가, 십장가, 형장가는 판소리 춘향가의 내용을 따서 사설을 지은 것이며, 적벽가는 판소리 적벽가와 비슷하고 제비가는 판소리 흥보가와 내용이 통하지만 이들 잡가가 판소리 곡조로 된 것은 아니고 다만 일부 사설만 따왔을 뿐이다.
평양가, 출인가, 방물가, 달거리는 서민적인 인정, 사랑 등을 노래하고 있다. 장단은 흔히 느린 6박 도드리장단이나 좀 느린 3박 세마치장단으로 된 경우가 많다. 선율은 서도소리제인 수심가토리와 경기소리제인 경토리가 뒤섞인 특이한 음조로 되어 있다.
경기긴잡가의 특징은 경기 특유의 율조로서 대개 서경적 혹은 서정적인 긴사설로 비교적 조용하고 은근하며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서정적인 표현이 많다. 조선시대 서울 장안의 소시민들의 모임장소인 ‘공청’ 또는 ‘깊은사랑’을 통해 12잡가가 발생하였으므로 공청소리문화의 특색을 잘 담고 있는 귀한 문화재이다.
이춘희선생은 1986년도 제주 한라문화제 대통령상 수상을 하면서 더욱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며 1989년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준 보유자 지정이 되면서 1990년대에는 당대 최고의 명인의 반열에 올랐쓰며 또한1997년11월1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예능보유자가 되시고 또한 2004년도에는 문화예술발전 유공자(화관문화훈장)서훈을 받았다.
이춘희씨는 국립국악원 민속단 예술감독이 되었다. 노래에 대한 탁월한 실력과 함께 그녀가 최초로 창안해 무대에 올린 소리극 ‘남촌별곡'은 경기민요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했다.
1995년 국립국악원에 들어와 생활하면서 이춘희 씨는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토요일에 열리는 상설무대 1년치 프로그램을 짜는 것. 하지만 경기민요로 1년치 프로그램을 짜자니 너무나 단순한 무대가 연상됐다.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또 다른 사람이 받아서 부르고, 함께 부르는 순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진 레퍼토리가 아니던가. 그래서 작은 무대지만 거기에 극적인 요소를 가미해 노래로 극을 만들었다. 이를 '소리극'이라 이름 붙였는데, 역시 가만히 서서 노래하는 것보다 관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1998년에는 드디어 '남촌별곡'이라는 소리극을 큰 무대에 올렸다.
처음에는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경기민요를 극으로 만들려면 등장인물만 적게는 50명에서 100명 정도는 예사가 아니였다. 경비가 엄청나게 소요되지만 이춘희선생님은 성공한다는 확신이 있었다.경기민요의 새로운 시도는 대중과 함께 숨 쉴 수 있는 전환점이 됐다.
한국종합예술대 김영재 교수가 많은 작곡을 했지만 가사를 쓰는 작업은 이춘희예술감독이 많은 부분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 1999년도 두 번째 작품인 노들골에 단풍드니, 춘풍별곡, 시집가는 날, 한 오백년, 미얄할미뎐, 일타홍전, 眞사랑등 많은 작품을 만들어 왔다.
현재 이춘희 씨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어린이들에게 경기민요를 전해주는 사업과 어린이들이 꾸미는 소리극을 무대에 올리는 것. 어렸을 때부터 경기민요의 맛을 알아야 커서도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경기소리는 결코 우리와 동떨어져있지 않은 친숙한 소리로,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서정적인 노래들이 많아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민족의 혼이 담겨 우리 역사와 함께 살아 숨쉬며 전해져온 경기소리는 우리가 계승하고 또 창조해 나가야 할 보배로운 문화유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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