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제도란 그것이 실제 펼쳐지는 장소에 따라 상당히 다른 효과를 나타낼수 있다. 같은 민주주의 정치제도라도 서유럽이나 북미 국가들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현격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그 지역 사람들의 전통과 문화와 사고방식에 따라서 그것들과 결합하는 제도의 운용 양상이 달리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민주주의를 아예 하나의 생활 양식’이라고 규정하는 이론도 있지 않던가.
우리나라의 경우 이제 절차적 민주화 또는 선거 민주주의는 완연히 뿌리를 내린 것으로 보고들 있으며, 그렇게 본다 해도 딱히 잘못된 주장이라고 말하기 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 선거가 어딘지 기형적인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고, 우리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불만스럽게 생각되고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많은 이유가 복잡하게 얽힌 결과일 테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
가 ‘지역주의 정치구도’ 때문이다.
선거를 아무리 치러도 결과가 뻔한 지역들이 많은가 하면, 소속 정치인들이 돈판으로, 술판으로, 성추행, 폭력행사, 막말 해대기 등등으로 제 아무리 깽판’을 쳐도 지지율은 항시 1위를 달리는 기이한 정당도 있고, 몇 번을 곱씹어 생각해도 분명히 이유 있고 절실한 개혁과제들일지라도 국회 안에만 들어가면 번번이 좌절되는 괴상한 현실도 참으로 많다. 이 모든 현상의 배후에 ‘지역주의’가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지역주의를 해결하기 위한 접근법과 정책에는 근본적으로 생각을 달리 하지만, 적어도 노무현 정권이 ‘만사의 근원에 지역주의가 있다’고 진단을 내린 것은 전적으로 정확하고 옳았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의 지역주의 선거구도는 ‘서울 중심주의’와 ‘반공 안보주의’가 추잡하게 뒤엉켜서 뿜어낸 배설물이다(이 발생론 부분은 길고 복잡한 설명을 요하므로 여기서는 일단 이쯤으로 줄인다). 낙선운동? 매니페스토 운동? 정책대결 선거운 동? … 좀 거칠게 표현하면 이들은 모두 실패한 운동이며, 지역주의가 창궐하는 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캠페인이다.
그런데 그 지역주의는 우리 선거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또 현재의 정치조건 아래에서는 (DJ나 YS의 생존 여부와 상관없이) 10년이고 20년이고 엄존 할 것이다. 그것이 이제는 ‘소지역주의’까지 자극하여 천파만파로 번져나간다.
심지어 지역주의는 유권자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합리적 대안’이라는 둥 해괴망측한 논문으로 정당성까지 얹어주는 학자들도 있다(이런 지식인이야말로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선고한 아테네 시민법정의 주역들과 같은 부류이다). 이처럼 지역주의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우리는 주기적으로 다가오는 선거도 피할 수 없이 치러야 하고, 지역주의의 악폐는 그것대로 계속 겪어야 하는 운명이다. 사람들은 이제 대수롭지 않은 일상쯤으로 여길는지 모르나 필자는 이것이 정말 한국정치의 낭패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지역주의 정치를 근원적으로 치유하는 길은, 선거구도나 정당구도가 기존의 지역주의 대결에 덜 몰입하는 대신 이념 및 정책대결 구도를 훨씬 더 성장시켜 정치사회가 다원화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국인들이 현재와 같은 반공주의 일변도의 이념적 족쇄로부터 스스로 해방되지 않는 한 좀처럼 넘보기 어려운 과업일 것 같다. 국가보안법 철폐 같은 작업이 그러한 과제를 풀어 가는 ‘작은’ 출발일 수 있지만, 지역주의 해소를 위한 기여는 고사하고 국보법 철패 자채만도 열린 우리당의 한계와 정책 오발 때문에 허물지 못할 태산으로 굳혀버렸다.
이런 와중에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쾌거가 ‘주민소환제도’의 법제화였다. 잘아는 것처럼 지역주의가 고착된 지방에서는 선거라는 것이 무의미하다. 그 지역 패권당의 공천이 사실상 당선 아닌가. 그러다 보니 지역 패권당의 오만이 넘쳐 흘러서 공천 잡음이 끊이지 않고 급기야 탈당자를 무소속으로 당선시키는 장난 질까지 횡행한다. 이쯤 되면 국민은 주권자가 아니라 지역 패권당에 의한 조작의 대상물일 뿐이다. 주권자가 겪는 이러한 수모를 그나마 지방정치 차원에서는다소나마 견제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주민소환제인 것이다.
주민소환제에는 ‘지역주의’가 없다. 수많은 한국인들을 마법에 걸어놓고 있는 지역주의가 주민소환 투표에서는 무용지물로 된다. 왜냐하면 지역주의 선거는 기본적으로 정당간 대결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극언하자면 한국 선거에서 정당공천제를 없애버리면 지역주의는 급속히 약화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대안이 될 수는 없으므로 현재의 선거제도를 인정하며 그 안에서 지역주의의 악폐를 덜어낼 수 있는 (국민/주민)소환제의 활성화가 차선의 대안으로 주목된다. 즉 주민소환 운동이나 투표는 대상 정치인(현재의 주민소환제도에서는 지방단체 장이나 지방의원에 국한되나, 참여민주주의가 진화해 가면 국회의원이나 기타 헌법기관 또는 그 구성원까지도 소환의 대상으로 확산시켜 가는 국민소환제가 필요하고, 실제 그렇게 될 것이다) 1인에 대해서만 소환의 찬반을 물어 심판하게 되므로 자연히 지역대결 구도가 없어지거나 대폭 희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기적 선거에서는 언제나 소수파가 될 수밖에 없는 정치세력도 소환운동이나 투표의 국면에서는 다수파로 바뀔 수 있는 희망이 생긴다. 거꾸로 특정 지역 에서 언제나 다수파이던 지역 패권당 정치인도 소환제가 활성화되면 (선거에는 지역주의 덕에 당선되었더라도) 임기 중 소환 대상자로 전락할 위협 앞에 항상적으로 노출된다. 이리 되면 지역 패권당 정치인들도 유권자 앞에서 겸손과 자기 절제의 노력을 그만큼 더하지 않을 수 없도록 압박받는다. 그야말로 정치의 질적 발전과 민주주의의 심화가 가능해 지는 것이다. 요컨대 주민소환제는
확실히 현재의 지역주의 증상을 상당 부분 완화시킬 수 있는 유력한 치료제가 되는 것이다.
이쯤에서 반드시 나오는 반론이 있다. 소환제가 오 남용 되어 소신정치 못게 족쇄 채우고, 정파간 정쟁몰이 도구로 전락하여 오히려 정치를 황폐화시키거나 걸림돌 되면 어쩌냐고. 가끔은 그런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 몇 건 일어난다고 국가 전체가 뒤집어지지는 않는다. 그리되기 전에 권력집단은 기다렸다는 듯 개입하여 사태를 반전시켜 갈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상이 뒤집어지는 일은 소환제 같은 그런 개혁적 제도가 활성화되지 못하도록 갖가지 이유를 들이대며 미리 가로막고 방해해서 부패를 만연시킴으로써 대부분 일어난다.
민주당 텃밭이던 미국 캘리포니아에 주민소환제 때문에 민주당 주지사 물러나고 그 대신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공화당적으로 주지사 되었다고 해서 캘리포니아가 거덜났던가, 미국에 난리가 났던가?
현재의 주민소환제는 그 오 남용 막는다고 지나치게 발동요건을 제한해 두고 있다. 취임하고 1년, 마지막 1년, 전체 4년 임기 가운데 무려 절반의 기간을 적용할 수 없도록 해놓은 것은 지나친 물타기 제도이다. 앞, 뒤 반년 씩 도합 1년만 유보기간을 두어도 족할 것이다. 소환투표 발의에 필요한 서명인원도 유권주민 10~20%로 규정한 것 역시 너무 과하다. 인구 50만 정도만 넘으면 기초든 광역이든 어떻게 그 많은 인원의 서명을 받을 것인가? 이런 제한들은 모두 현행보다 더 완화해야 한다. 그리하여 정치인들이 주권자/유권자 무서운 줄을 지금보다 훨씬 더 체질적으로 느끼며 활동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진짜 존경받을 정치인은 그래도 다 시민들로부터 존경받으며 헌신할 수 있다.
앞서 잠깐 언급한 대로 지방선거에서 정당공천제 다 없애버리면 지역주의는 약화된다. 그러나 지역주의 문제와 별개로 주민소환제는 그것대로 중요하다.
정치인 자신들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정말 주민을 위한 정치라면 반드시 더 활성화시켜야 한다. 또 정당공천제의 경우도 광역단체까지 다 없애는 것은 곤란하기도 하다. 요컨대 정당간 선거 대결에서 당분간 지역주의가 피하기 어려운 폐단이라면 주민소환제가 그 폐단까지도 해결해 주는 다용도 처방이라는 점을 강조코자 한다.
마지막으로 꼭 첨언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나 FTA가 만발할 앞으로의 세계질서에서 그 본질은 경쟁의 격화이고 거기에서 주민의 권리와 삶의 질을 지켜내는 데 주민소환제가 얼마나 요긴하게 쓰일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경쟁이 격화되면 국가든 지방이든 권력자들은 주민 다수의 이익보다 세계적인 자본과 기업의 요구 앞에 굴복할 가능성이 점점 더 높아진다. 그럴 때 몇년에 한번 씩 다가오는 선거라는 수단만으로는 권력과 자본의 횡포 앞에 주민권익을 지켜내기가 너무도 취약해 진다. 주민 또는 지역시민단체들에게 거의 일상적이고 직접적인 감시와 통제의 참여수단이 절실해 질 것이다. 그 가운데 주민소환제가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리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