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관장 김삼웅)은 31일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상소 운동을 펼친 송병선 선생을 2006년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그 공적을 기리는 전시회를 오는 1일부터 30일까지 개최한다.
내 용 : 선생이 조국을 위하여 순국을 결심하고 쓴 마지막 상소이자 제자들에 대한 행동지침이 된 을사유소 등 다수의 공적사진.
1836년 충남도 회덕에서 태어난 연재 송병선 선생은 1867년 충북 옥천의 이지당(二止堂)에서 시작된 강회활동을 시작으로 1905년까지 전국 각지를 순례하면서 143명의 사우와 1,100여 명에 이르는 제자들을 양성, 규합하여 일제의 침략에 대응할 수 있는 인력을 배양하고 국권회복의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선조들의 문집을 편찬하고 (근사속록)(1874),(동감강목(1900) 등의 저술을 통해 조선을 유지해 온 성리학 사상을 널리 확산시켜 외세에 대응할 수 있는 견고한 사상적 무장을 도모했다.
선생은 1877년부터 1905년에 이르기까지 20여 차례가 넘는 상소를 통해 무분별한 개화정책과 일제의 침략에 대한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를 개선하고자 하였으며, 특히 1884년의 「신사봉사 8개조」를 통해 대내적인 안정을 꾀하고 일본제국주의의 세력을 철저히 배격하여 국권회복의 토대 마련을 주장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선생은 두 차례의 상소를 통해 을사늑약의 파기와 5적을 처단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고, 주권을 되살리고자 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에 좌절하지 않고 선생은 광무황제와의 독대를 통해 일제에 맞설 수 있도록 군사력 양성 등 10가지 시책을 건의하여 조국을 구하고자 한다.
일제는 이러한 움직임에 선생을 1905년 12월 28일 대전으로 압송하였고 그 후 선생은 끝내 ‘바른 도(道)를 지키고자’ 죽음을 선택하여 12월 30일 순국했다. 이에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