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 정방동

장마가 끝난 첫 휴일 정방폭포 앞에 섰다. 비류직하삼천척! 긴 장마가 끝난 후 떨어지는 폭포소리가 우렁차다.
한여름에 흰 눈 날려 청산은 서늘하고(雪飛三伏靑山冷) 무지개는 긴 긴 날을 허공에 걸려있네(虹掛半空白日長)
영주십경을 처음 지은 제주시 도련동 출신의 매계(梅溪) 이한우(李漢雨;1818~1881)가 읊은, 영주십경 중 제4경 ‘정방하폭(正房夏瀑)’의 한 구절이다.
아제 아제 바라 아제
등산화를 벗고, 바지를 걷어 올렸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다짐이 벌써 세 번째다. 하지만 제작연대, 내력, 작자 등 풀리지 않는 궁금증으로 다잡은 마음은 얼마 가지 못하고 계속 이곳을 찾게 된다. 이곳의 토박이들도 모르겠다는 석불의 내력에 대한 단서를 혹 석불을 마주하고 있으면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어리석은 일념으로.

▲ 정방의 작은 물줄기를 건너야 석불을 만날 수 있다.
관광객들이 득실거린다. 낙석주위 출입제한을 알리는 안내판도 맘에 걸린다. 이럴 땐 안면무치여야 한다. 첨벙!’주변을 의식할 겨를이 없다. 정모시[正方]에서 바다로 흘러가는 물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이제 들리지 않는다. 부서지는 폭포수 안개 속에 묻어오는 독경(讀經)소리,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이 조그만 물줄기가 속세와 피안, 그 사이를 구분 짓는 경계선인 듯하다.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는 초입부터가 만만찮다. 주상절리의 벼랑이 내려앉아 겹겹 바위지대를 만들었다. 이곳을 지나면 매끄럽고 고만고만한 돌들이 깔린 아담한 ‘몽돌밭’이 나온다. 석불이 있는 석굴은 그 앞에 가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넉살 좋은 동네 삼춘
뾰족한 삼각형 모양의 해식동굴은 입구에서 끝까지 좁은 보폭으로 약 35보, 그 오른쪽 벽 중턱 이슥한 곳에 석불은 검푸른 바다를 굽어보며 조용히 좌정해 있다.

▲ 동네 삼춘 같은 석불.
약 2m 80cm의 앉은키에, 약 1m 60cm의 떡 벌어진 어깨의 거대한 석불. 통통한 얼굴에 뭉툭한 콧날은 우뚝 섰고, 미소 띤 입가엔 주름이 환하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엔 가사가 걸쳐졌다. 왼손은 바닥을 위로 하여 가부좌한 왼쪽무릎 위에 올려놓고, 오른손은 오른쪽무릎 위에 가볍게 올려놓았다. 석굴암의 본존상과 같은 모습이지만 대좌(臺座)는 없다.
머리 뒤쪽의 벽에는 붉은 빛의 둥그스름한 무늬가 선명하다. 그 자체가 머리광배(光背)다. 석불을 제작한 장인은 분명 이를 염두 하여 두상의 위치를 정했을 것이다.
석불은 정면에서 보면 벽에서 완전히 떨어져 조각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옆에서 보면 몸통 뒷면 전체가 벽에 붙어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석불을 조각한 석공의 솜씨를 문외인 내가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다만 만날 때마다 느껴지는 건, 그저 넉살좋은 동네 ‘삼춘’ 같다는 것.
언제, 누가, 왜 ?
작년 한학자 오문복 선생의 안내로 처음 석불을 봤을 때 들었던 의문이다. 선생은 1979년 당시 90여세의 이곳 촌로에게 그 존재를 듣고 처음 목도했다고 했다. 당시에도 그 내력을 알 수는 없었다.
금번 답사에서도 각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지만 석불의 존재조차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왜정 때 만들어졌다느니, 대학교수가 만들었다느니 하는 사람을 몇 만날 수는 있었지만 그들 또한 당시 추측하는 말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다만 하효리에서 남편을 따라 이곳에 온지 50년쯤 된다는, 근처에서 만난 아주망(아주머니)이 들려주는 한 마디에서 이 석불이 적어도 196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앞바당에서 물질’을 해십주. 그때도(50년 전) 물에 들엉 굴쪽을 보민, 부처님이 보여수다. 그 내력은 잘 모르쿠다.

▲ 석불의 옆모습.
분명한 것은, 불상의 오른쪽 어깨에서 팔꿈치, 왼쪽에 걸쳐진 가사와 가사의 주름, 목 아랫부분, 머리 뒷부분과 벽 사이가 시멘트로 덧칠 되거나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머리 또한 몸체와 한 덩이가 아닌 듯하다.
즉, 몸체는 암벽 앞으로 솟아 나온 부분을 다듬어 만들고 그 위에 머리를 따로 조각해 올려놓았으며, 몸체의 부족한 부분을 시멘트로 덧발라 몸체의 형상을 완성한 듯하다.
석불에서 저만치 떨어져 놓여 있는 돌향로는 외부에서 제작해서 시멘트로 암벽 위에 붙여놓은 것이다.
▲ 돌향로 주변 벽에 새겨진 육각형 무늬.
또 특이할 만한 것은 돌향로가 놓인 암벽 표면에 널찍하게 육각형 무늬가 연이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한 변의 길이가 50cm 안팎, 폭이 약 5cm. 새기다 만 것도 보인다.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 불상 제작자와 동일한 사람의 새김인지, 모든 것이 아리송할 뿐이다.
석불은 말이 없고
좌정하고 있는 석불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보리수 아래서 성도(成道)했을 때의 석가의 모습이라 한다. 이곳에 석불을 모신 이는, 이러한 부처를 모시고 자신 또한 돈오(頓悟)의 순간을 염원하던 수도승일지도 모른다.
한편, 석굴이 있는 암벽과 서쪽 절벽 사이의 낭떠러지는 4·3 당시의 학살터라고 한다. 절벽 위에서 아래로…. 어쩌면 이곳을 떠돌고 있을, 그때의 무고한 원혼을 달래기 위해 그 자손 중의 누군가가 석불을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당시 가해자 중 누군가가 속죄하며 서툰 솜씨로 불상을 새겨 그들의 극락왕생을 빌었던 것은 아닐까?

▲ 석굴 안에서 바라본 전경.
석불은 말이 없다. 그러한 석불 곁에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다시 피안의 물줄기를 건너 돌아왔다. 알 수 없으면 없는 대로 남겨두자. 풀리지 않기에 비밀은 비밀이 아니던가. secret !’ 안개 속에 들려오던 독경(讀經)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는다.
<글 사진 백규상 제주동양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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