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창덕궁 후원의 내원상화갱재(內苑賞花賡載)는 왕족만이 참여할 수 있었으나 정조는 정책연구기관인 규장각 각신(閣臣)들을 예외적으로 우대하여 1788년(정조12)부터 내원(內苑:창덕궁 후원)에서 꽃구경하고 낚시하는 내원상화갱재(內苑賞花賡載) 모임을 정기적으로 가졌다.
1792년 3월 21일에 창덕궁 후원에서 정조와 규장각 각신들이 꽃구경과 낚시를 즐기면서 시를 지었으며 규장각 제학(提學) 오재순(吳載純)을 비롯한 규장각 각신 및 그 자제 27명이 참여하고 내원(內苑:창덕궁 후원)에 위치한 농산정(籠山亭)에서 꽃구경을 하고 수택재(水澤齋:부용정)에서 낚시를 하였으며 춘당대(春塘臺)에서 활을 쏘았다.
1793년 3월 20일에 정조와 정민시(鄭民始) 등 규장각 각신들은 353년(계축) 3월에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 등 중국 동진(東晋)의 명사 42명이 난정(蘭亭)에서 액운을 떨쳐 버리기 위한 계제사(禊祭祀)를 지낸 후 곡수구(曲水溝)에 술잔을 띄워 돌리며 시를 짓는 곡수유상(曲水流觴)을 베풀었던 난정(蘭亭)고사(故事)를 본떠 창덕궁 후원의 인조 대에 소요암(逍遙巖)을 깎아 곡수유상연(曲水流觴宴)을 위한 둥근 곡수구(曲水溝)를 만들고 맑은 물이 바위를 돌아 폭포처럼 떨어지는 옥류천(玉流川)에서 술잔을 띄워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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