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옥당(玉堂)은 국왕 자문기관 홍문관(弘文館)의 별칭이며 옥당(玉堂)은 옥같이 귀한 문형(文衡:대제학)이 근무하는 건물’이라는 뜻이다.
문형(文衡대제학)이 국왕의 자문에 응하여 국왕의 주요 정책 결정,정무적 판단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게 하는 의미로 옥당 편액의 玉을 새겼으며 추위를 막기 위하여 문에 치는 휘장 문염자(門簾子)를 걸었다.
홍문관(弘文館)은 조선 시대에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국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옥서(玉署)·영각(瀛閣)·서서원(瑞書院)·청연각(淸燕閣)이라고도 불렀으며 학술적인 관부이면서 사헌부·사간원(司諫院)과 더불어 언론 3사(言論 三司)의 하나로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다.
홍문관직은 청요직(淸要職)의 상징이었고 조선 시대의 정승이나 판서를 지낸 사람으로서 홍문관을 거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홍문관 관원이 되려면 교서(敎書) 등을 기초하는 지제교(知製敎)가 될 만한 문장과 국왕에게 경전을 강론하는 경연관(經筵官)이될 만한 학문과 인격이 있어야 함은 물론 가문에 허물이 없어야 했다.
홍문관의 일은 본래 정종 대에 설치한 집현전(集賢殿)에서 맡아 하였는데, 세조 초에 세조 집권에 반대한 사육신이 주로 집현전 학사들이었기 때문에 세조가 폐지했다가 1463(세조 9)년에 홍문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설치한 것이다.
연조 대에 잠시 진독청(進讀廳)으로 고쳤다가 1506(중종 1)년에 복구했다. 1894년에 경연청과 합하여 이듬해에 경연원(經筵院)이라 개칭했다가 1896년에 다시 홍문관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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