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목 :
4월 국회의원 의정활동을 보면서
진실(眞實)은 밝혀진다
지옥(地獄)과 연옥(煉獄)은 존재(存在)한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질까? 지옥과 연옥이 있어서 사람을 벌할까? 누가? 아마도 인류가 기록으로 삶의 흔적을 남기기 시작한 이후부터 줄기차게 물었을 질문이고 공포에 사로잡혀서 그래도 지키려고 노력했을 것이라 상상해 본다.
오늘을 사는 ‘신인류’는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이 없다. 죽음에 대하여 모두를 알아 버린 듯 행동하며 산다. 삶의 환경에 따라서 ‘신인류’의 의미가 여럿 있겠지만 역시 단연 으뜸은 ‘거짓을 두려움 없이 말하고 목적 달성을 위해 염치 불구하고 행동하여 성공할 수 있는 탄력적 적응 능력을 가진 인간집단’이란 의미다. 신인류가 되지 못한 사람들은 사회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진실은 무엇이고 거짓은 무엇인가? 그저 인간의 관념 속에서 나름대로 정의되는 단순한 현실일까? 아니면 그 이상으로, 인간에게, 인류에게 영향을 주는 무엇이 있을까? 아니면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과 우주의 문제일까? 우주와 자연의 극히 일부로서 극소의 존재인 인간이 극소의 공간인 지구에 살면서 진실을 묻는 일조차 의미가 있을까?
양심, 좋은 습관, 윤리와 도덕, 긴 세월 정제된 법, 문화와 역사는 개인의 관념 속에서 유희되어도 문제가 없는 원칙들인가?
‘양심’이란 선량한 마음을 의미한다. ‘법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 정도를 넘어서서 개인 스스로에게 거짓이 없음을 의미한다. 현실 사회에서 오늘을 사는 인류에게 너무 어려운 명제다. 하지만 양심에 따라 사는 삶은 편안하다.
‘좋은 습관’이란 선량한 행위를 오랜 동안 익숙하게 실행하여 얻은 일정하고 규칙적인 태도나 행위를 의미한다. 개인의 삶 속에서 스스로 올바르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정정당당한 공명정대한 집약적 태도와 행위를 의미하는데 역시 어렵다. 건전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윤리와 도덕’이란 공동체 사회 구성원들이 나름대로 정한 개별적 삶의 기준과 원칙의 공통분모로서 보다 넓은 공동체에 적용될 때 그 의미를 갖는다. ‘도덕’은 마음 속의 문제로, ‘윤리’는 실천된 행위의 문제로 본다면, 공동체 삶의 방식에 의거하여 마음과 행위를 준수해야 하며, 이에 공동체에 적응력을 높일 수 있게 된다. 공동체의 규모에 따라, 또는, 구성원의 합의에 따라, 실체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도덕과 윤리’는 삶의 방식으로서 영향과 대응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윤리와 도덕’을 따라 살면 사회 생활의 피해 또는 불이익을 줄일 수 있다.
‘긴 세월 정제된 법’이란 인간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공동체가 합의하여 결정한 인간의 사회적 행위의 기본 원칙으로서,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공동체 구성원들이 지켜온 사회적 원칙을 의미한다. 법은 시대가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소수집단에 의하여 독점됨으로써 왜곡되기도 한다. 국가는 법을 통하여 수없이 많은 사건을 재단해야 하고, 개인 또는 국민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 정도를 결정해야 하는데, 법의 발전 속도의 오차로 인하여, 수없이 많은 사회적 갈등을 해소해야 하지만 아직도 많은 갈등이 양산되기도 한다. 법은 사회 생활을 이롭게 하기 쉽다.
‘문화’란 사회가 발전하면서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합의한 삶의 최우량 방식을 의미한다. ‘문화’란 인간 삶의 결정체로서, 공동체의 삶이 세월 따라 누적되고 단련되고 공동체 구성원들이 가장 선호하는 삶으로 남아 다시 검증되기를 수없이 하여서 남겨진 삶의 최우량 가치를 의미한다. ‘문화인’이란 말도 있다. ‘문명인’과는 차이가 있는 이 말의 의미는 오늘을 사는 인류에게 사치스러운 말이다. 모든 일을 급하게 해결해야 하고, 효율적으로 마무리해야 하며, 과실을 많이 먹고 남겨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문화는 인류에게 풍요롭고 가치가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준다.
‘역사’의 의미는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아마도 ‘모든 사건은 역사를 통하여 해석 된다’ 또는 ’역사는 미래의 가치를 구성한다’고 한다면, 역사 역시 인류에게 귀중한 조언을 해 주고 있다. 역사의 순리와 가르침을 거스르는 사람들은 당대 또는 그 후대에 가서 대가를 치른다는 의미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오늘을 사는 인류에게 사치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역사의 조언을 따라 살면 사회와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며 살기가 쉬워진다.
서울에서 이른 새벽에 차를 타고 문을 나서면 화가 난다. 교통 질서와 운전 수칙을 지키지 않아서, 공동체의 합의를 지키지 않아서, 함께 사는 사람의 평화로운 삶을 침해하는 것 같아서 두려움을 금할 수 없다. 골목길부터 고속도로까지 교통질서 규정과 양심에 비추어 관찰할 때, 원칙과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는 생각에 전쟁터를 떠올린다. 문 밖 세상이 전쟁터란 생각에 한낱 개인으로서 새롭게 각오를 다져보기도 하지만 짜증이 나는 일은 어쩔 수 없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인간은 극소(極小)의 무의미(無意味)의 존재(存在)다. 관념(觀念) 속에서 인간은 극대(極大)의 유의적(有意的) 존재(存在)다. 그러나 자연과 우주의 진실(眞實)이란 실체 앞에 인간은 허구(虛構)다. 오늘을 사는 인류는 자연을 극단적으로 이용하여 물질문명을 이루었다고 자부하지만 허구의 공동체를 이루고 산다.
우주 일부에서 원칙을 찾아내고, 우주 실체를 보고자 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서 우주는 무한(無限)이고 무량(無量)이다. 지구촌 내 자연을 연구한 사람들이 그래도 많아서 오늘을 사는 인류는 자연을 훌륭하게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연의 실체를 보고자 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서 자연은 역시 무한(無限)이고 무량(無量)이다. 자연은 인류에게 무한 혜택을 남겨두고 있다.
오늘을 사는 인류는 자연을 파괴한다. 자연과 환경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는 행위 때문에 인류가 얼마 가지 않아서 멸망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후의 급격한 변화로, 자연의 재앙으로 인간이 사는 공간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인간의 생명력은 질기고 강하지만 인류의 무차별적 파괴 행위 앞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신인류가 되지 못한 사람들은 절망하고 불행한 삶을 살기 쉽다. 신인류 인간이 비신인류 인간의 생명, 생명력,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을 도와야 한다. 신인류가 보호하고 있는 물질을 아낌없이 자연에 투자해야 한다. 문화 창달에 쏟아 부어야 한다.
지옥과 연옥이 있다지만, 우주 어딘가에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있을 수도 있겠지만,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를 지옥으로 연옥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진실을 거부해서도 타협해서도 안 된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 자연처럼 살아가야 한다. 지구촌에 사는 인류는 자연으로부터 아니 우주로부터 왔다. 자연과 우주의 법칙을 배우고, 삶과 죽음을 자연과 더불어 생각하며, 자연을 따라 살아야 한다. 사회의 발전도, 자연의 개발도 자연과 우주의 법칙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자연의 변화 과정 속에 절대적 파괴행위(破壞行爲) 도 절대적 비파괴행위(非破壞行爲)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생명의 공간을 인정하고 생명의 노력을 인정한다. 자연은 삶과 죽음의 향연(饗宴)이다. 생명은 살아 있음에 자연에서 얻으며 기여하며 존재한다. 생명은 죽으면서 자연에게 아낌없이 주고 자연으로 돌아간다. 자연이 생명이고, 삶이 자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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