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0년대만 해도, 유럽을 난생 처음 구경하고 온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체험이 있다. 그곳
에 다녀와서는, 충격을 받은 듯 제일 먼저 신기하다며 꺼내는 말이, “거, 유럽의 집들에는 울타
리가 없어” 하는 식이었다. 담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미숙련 삽살개 정도면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을 수준의 나지막한 나무울타리가 전부다.
그에 비해 우리의 것들은 어떠했는가? 유럽과는 판이하다. 시멘트로 험상궂은 장벽을 쌓아올리고
도 불안해 날카로운 유리조각들을 담 끝에 촘촘히 박아놓고, 또 그 위에 철조망을 이중삼중으로
둘러쳐 마치 토치카처럼 보이던 주택들이, 우리 도시에서는 흔히 눈에 띄었다. 뿐만 아니라 개
도 없으면서, 왕왕 ‘맹견주의’라는 엉터리 경고판까지 터억 하니 걸어놓기 일쑤였다. 가히 완
벽한 안보체제 구축이라 할 만하였다.
우리는 범람하는 군사문화 속에서, 우리의 정신까지 이렇게 완전무장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렇게 요새 같아 보이는 담벼락도 일단 뛰어넘기만 하면 안방까지의 진입
은 식은 죽 먹기 식이었다는 사실이다. 창문고리나 현관 출입문의 개폐장치가 어이없을 정도로
허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은 정반대다. 부질없는 그 담장을 보고, 안방의 보석함이 내 손안에 있는 것이나 다
를 바 없다고 낙관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대개 하루 종일 열려 있기 일쑤고 허
술하기 짝이 없는 울타리를 통과한다 하더라도, 그 이상의 진출은 거의 불가능하다. “가정은 성
이다” 라는 영국의 격언이 있긴 하지만, 안채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성채처럼 버티고 있다. 완
벽에 가까운 자물쇠 장치와 물 한 방울 새어들지 않을 정도의 빈틈없는 창틀이, 맹위를 떨치기
때문이다. 요컨대 형식은 어수룩하게 보이지만 내용은 튼실하다.
그러나 우리는 정반대다. 겉은 맹수처럼 어마어마해 보이지만, 속은 새우처럼 물러 터져 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적 형식주의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우리 사회현실의 흐름 곳곳에, 폐수처
럼 의연히 녹아들어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겉으로는 휘황찬란한 듯이 보이나, 속으로는 연
신 곪아터지고 있는 일들이 어디 한둘인가. 가령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 같은 것들이, 겉모습이
허술해서 무너져 내렸던가.
어느 여름 나는 산사(山寺)에서 한동안 지낼 요량으로, 괴나리봇짐을 싸들고 무작정 상경파처럼
표표히 집을 떠난 적이 있었다. 허나 절마다 특히 수험 준비생으로 만원이었다. 꽤나 힘들게 빗
속을 떠돌다가 영동 부근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어느 암자가 용케도 걸려들
어, 며칠 묵어가도록 허락 받았다. 첫날에는 역시 빈방이 없어, 공사를 끝내고 다음 날 새벽 이
절을 떠난다는 인부들 틈에 끼어, 첫날밤을 새우잠으로 밝혔다.
그런데 다음 날 이른 아침 나는 불현듯 잠에서 깨었다. 완전무장한 경찰과 여러 명의 방위병들
이 나를 기습한 것이다. 하룻밤 같이 몸을 뒤척였던 인부들 중 누군가가 새벽에 산을 내려가서
는, 수상한 사람이 나타났다고 파출소에 신고한 모양이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지독
히 고약한 연분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사냥개들이었다. 얼마나 철저히 단련된 신고정신인가. 주
민등록증을 보여주었더니, 그것도 위조가 많아 못 믿겠다고 해서, 교수신분증까지 보여주었다.
철통같은 안보태세 앞에서는, 대학교수도 아무 쓸모없는 존재였다. 모다 가짜로만 보이는 눈치였
다. 붙들 수 있는 건, 오직 운명밖에 없었다. 나는 달관한 선승처럼 체념하였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다름 아닌 바로 주민등록증이, 결국 나를 해방시켰던 것이다. 그 경관
은 거기에 붙어 있는 병역란에 기재된 내 출신 군대를 보더니, 경례를 처억 부치며, 자기도 같
은 군대를 제대했다며 반갑게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교수신분증보다도, 그 짧은 기간이나마 군
대라는 휑뎅그렁하지만 동일한 공동체에 몸담았다는 속절없는 추억 하나가, 더욱 확고한 신원증
명의 근거로 작용한 것이다. 그리곤 그들은 반가워하며 철수했다.
겉으로는 당당히 활개치는 듯하나, 속으로는 연신 곪아터지고 있는 일들이 어디 그뿐일까. 밖으
로 세워 올린 건축물들은 또 얼마나 위풍당당한가. 예컨대 박정희 시절, 서민을 위한다는 명분
을 내걸고 세워 올렸던 ‘시민 아파트’들은, 그 전형적인 사례에 속한다.
결국 우리의 ‘와우 아파트’가 의젓한 본때를 보여주기는 하였다. 나 역시 서울에 시민 아파트
가 활기차게 솟아오를 무렵, 그곳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그 시민 아파트들은 대체로, 어디서
보더라도 금세 시야에 확 들어와 안길 듯한 전망 좋은 곳에, 멋들어진 고층으로 자리 잡고 있었
다. 그것은 마치 고지에 나부끼는, 장엄한 조국 근대화의 깃발 같았다.
허나 나는 참으로 흥미진진한 우격다짐식 경험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화장실은 물론 공용이
었지만, 우리는 거기서 항상 우산을 들고 앉아, 용변을 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1년 내내 장마
만 계속된 시절도 아니었고, 비가 새어서 그런 것도 물론 아니었다. 그 아파트는 나무로 엮어낸
것도 아니었고, 응당 시멘트로 우람하게 만들어진 새 건축물이었음은 물론이다. 허나 우리의 그
시민 아파트에서는, 천장에서 물인지 오줌인지 모를 물방울들이 끊임없이 새어나와, 아래쪽으로
하염없이 떨어져 내렸다. 당당한 겉모습과는 달리, 새 건물이었는데도 안은 이처럼, 중병을 앓
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부실공사의 귀여운 증인이었던 셈이다.
와우 아파트가 무너진 후에도, 겁도 없이 우리 집에 가끔 놀러왔던 내 친구 하나는, “걱정 마.
이 집은 ‘벌떡 아파트’니, 무너져도 금방 일어나” 하며,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 어쨌든 시민
아파트의 ‘시민’이란 말은 다름 아닌 ‘허드렛 무리’, 바로 그 자체였던 것이다. 허드레로 지
어, 허드렛 사람들을, 허드레로 살게는 하면서도, 겉은 그야말로 휘황찬란하고 웅장하게 보이도
록 만든 건물, 그게 바로 시민 아파트였던 것이다. 사실 그게 박정희식 ‘조국 근대화’의 참다
운 내용이기도 했다.
후딱후딱’ 이데올로기
어느 한글 학자 해석이다. 그에 의하면, ‘아름답다’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아리땁다’의
‘아리’ 또는 ‘아지’는, 병아리, 송아지의 예에서 보듯이, 어린 것, 작은 것을 나타내는 접미
사라 한다. 이처럼 본시 자그마한 체구 또는 어린 여자의 용모를 묘사하던 아름답다는 말이, 언
제부턴가 서구어의 영향으로,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하는 식으로, 적용범위가 한껏
넓어졌다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한다.
본래 국토가 작아서인지, 우리는 작은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작은 성취에 만족을 느끼며 살
아온 민족이라 할 수 있다. 가난 속에서도 행복을 찾으면서, ‘이웃사촌’이라며 이웃끼리 훈훈
한 정을 나누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근래 들어 ‘졸부’라는 표현에도 그대로 드러나듯이, 짧은 기간에 갑자기 큰 부자가 된
사람이 많아진 탓인지, 이런 취향이 돌변해버린 듯하다. 아담한 미인에서 ‘슈퍼모델’을 찾게
되고, 가수도 ‘대형가수’ 정도 되어야 겨우 눈길을 주는 세태로 변했다. 돈을 벌어도 한목에
왕창 벌어야 하고, 망해도 일시에 폭삭 망하려 한다. 바겐세일도 ‘몽땅 세일’ 또는 ‘창고 대
매출’이어야 하고, 물건을 살 때도 깡그리 ‘싹쓸이’ 해야 직성을 푼다. ‘가격파괴’ 정도 되
어야 눈길을 줄까 말까다. 최고지상주의, 한탕주의가 난무한다.
‘형식주의’라 함은, 한편으로는, 능력이 미치지 못함에도 남들과 똑같아지고 싶어하는 욕심
과, 다른 한편으로는, 남들과 못내 달라지고 싶어하는 욕구가 이율배반적으로 뒤섞인 상태를 이
른다. 첫 번째 것은, 빼어난 것으로 이해되어지는 남을, 무조건 모방하고 추종하려는 의지로 귀
결되지만, 반면에 두 번째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을 앞지르고, 남과 결정적으로 격차를 만
들고야 말겠다는 결의로 나타난다.
허나 우리의 형식주의는 과감하게 두 측면을 한꺼번에 다 포괄하고 있다. 그리하여 병적인 ‘귀
족주의’와 ‘물신숭배’, ‘사대주의’ 풍조가 한편에, 그리고 동시에 지나친 ‘자기 최고주
의’ 식 자기최면술이 다른 한편에 도사리고 앉아,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약자의 재난은 남을 팔아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 ‘빛 좋
은 개살구’, 이것이 우리 시대의 국민윤리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노자 선생도 “진실한 말은 꾸
밈이 없고, 꾸밈이 있는 말엔 진실이 없다”고 가르쳤다. 우리 사회는 언제까지나 진실이 아니
라 꾸밈에만 매달려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 조상은 “뚝배기보다는 장맛”이라 하여 건강한 ‘내용주의’를 설파하지 않았던
가. 요컨대 보잘것없는 겉모양보다는 훌륭한 내용을 뒤쫓던 게 바로, 우리 전통이었다는 말이
다. 하지만 지금은 안에 든 것보다는 바깥 포장에 더욱 신경 쓰는 형편으로 뒤바뀌어 버렸으니,
어쩌다가 이런 곱던 마음가짐이 행방불명 되어 버렸을까. 우리 현실은 지금 ‘장맛보다는 뚝배
기’라는 한국적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이를테면 안에 든 장은 엉터리로 남겨둔 채 뚝배기
만 근사하게 꾸며놓고 희희낙락하는 동안, 우리는 IMF의 된서리를 맞고 신음한 적도 있다.
아무튼 8·15 이후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를 줄기차게 지배해온 규범이 있다면, 그것은 ‘후딱후
딱’ 이데올로기다. 요컨대 ‘대충대충’ 아니면, ‘빨리빨리, 그러나 아무렇게나’ 정신이 우리
를 줄곧 지배해왔다는 말이다.
이러한 ‘졸속의 원리’는, 조그만 도로공사에서부터 크게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한 정책
결정에 이르기까지, 사회와 나라 구석구석에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다. ‘후딱후딱’과 ‘대충대
충’ 이데올로기가 바로 우리의 정치이념이자 생활철학이었던 것이다. 어디 그것뿐이었겠는가.
우락부락한 한탕주의가 또 그 옆자리에 근엄하게 똬리를 틀고 앉아 있기 일쑤였다.
‘빛 좋은 개살구’, 이것이 마치 우리 시대의 지표처럼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해서 근래에 나
는 새로운 구호 하나를 개발해내었다. 높은 자리에 계신 분이건, 학생이건, 장삿꾼이든지를 가리
지 않고, 나는 한결같이 “물 한 모금 마실 때도 목숨 바치는 자세로 임하면 만사형통이다!” 하
고 읊조리고 있다.
이러한 정신으로 우리의 형식주의를 극복해나간다면, 우리 사회는 보다 내실 있고 건강한 시민
적 정기를 복원해낼 수 있지 않겠는가.
박호성의 상식론 -18] 내 마음 속의 ‘형식주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