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부터 이름난 명산을 오악(五嶽)으로 삼아 국가의 제사를 지내왔다. 그래서 산신에 대한 제사는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중요한 제사대상으로 존재했다.
국가적 차원이 아닌 마을단위의 산신제는 그 기록을 확인할 수 없어 정확한 기원을 파악할 수 없으나 대개 마을이 생겨나면서 마을신으로서 산신을 모셨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도당신은 마을을 관장하는 신으로서, 경우에 따라서는 산신과 동일하게 여겨지기도 하며, 도당과 산신을 동일한 신격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산신제가 성황제의 절차에 속해 이중구조를 이루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는 성황제를 지내기 전 산신제를 먼저 지내는 양상으로 성황제에 의한 절차로 산신(山神)을 따로 모시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산신을 성황(城隍)이나 도당(都堂)과 달리 별개의 신령(神靈)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도당(都堂)과 산신(山神)이 서로 다른 신령(神靈)인지 혹은 서로 다른 신령의 개념이 지역신으로 인식되면서 서로 다른 것으로 인식되던 대상들이 통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성황(城隍)은 민간차원에서 왕성하게 모셔졌던 성황제는 유교를 중심으로 국가의 질서가 재편되던 조선 초기부터 국행제(國行祭)의 대상이 됐다. 조선 초의 이러한 움직임은 지방의 성황에까지 왕명을 대신한 지방관이 민간차원에서 치제되던 성황제를 주도하여 전국에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지배질서를 세우고자 의도한 것이다. 각 지방의 성황에 대한 제사는 그 규모나 절차 등이 정해져 있다. 그것은 유교적 이상에 의한 것이었고, 국가에 의해 음사로 규정되어 금해졌던 민간차원의 성황제는 여전히 성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