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목 :
아, 남한강 강가에 앉아 포송령公을 만난다
불가에 '인연불공'이라는 불전의식(佛前儀式)이 있다. 불전에 공양물을 올리고, 좋은 배필을 만나게 해주소서, 라는 기도가 인연불공이다. 나는 가끔씩 혼인을 하지 못하는 노총각, 노처녀의 부모로부터 좋은 인연을 만나게 해달라는 뜻의 불공을 의뢰받았다.
불전에 간절히 송경, 기도하고, 축원을 하지만, 인연을 영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있다. 노처녀, 노총각 중에는 인물이 출중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혼인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노처녀, 노총각이 어찌 이성을 단 한번도 만나지 못했을 것인가. 그러나 산봉우리에 머물지 않고 스쳐가는 구름처럼, 지나쳐 버리는 인연이기에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은 일체중생은 인연(業緣)에 따라 탄생하고, 인연에 따라 소멸한다(諸法從緣生 諸法從緣滅)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남녀가 서로 배필이 되는 인연은 오백생(五百生)의 인연이 있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부부가 되는 인연법이 오백생의 인연이라면 신비주의로 통하는 문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홀로 살면서 서책을 대하는 것을 가장 큰 취미로 삼는다. 그 서책 속에서 중국의 포송령(蒲松齡)이 저술한 요재지이(聊霽志異)와 구우(瞿佑)가 저술한 전등신화(剪燈新話), 진나라 사람이 적은 수신기(搜神記), 당나라 사람이 적은 유괴록(幽怪錄), 베트남의 영남척괴열전(嶺南摭怪列傳), 조선의 천재 김시습이 적은 금오신화(金鰲新話) 등을 즐겨 읽은 바 있다. 앞서 열거한 책중의 이야기는 귀신의 이야기가 주종이어서 황당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신비(神秘), 괴기(怪奇)한 이야기 기운데는 언제나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주제(主題)가 있어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고해대중을 교화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포송령은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산동지방의 문사이다. 그는 붓 끝에 신기가 어리고, 글에서는 향내가 난다는 찬사를 받는 뛰어난 문장가였다. 그는 벼슬길을 원하여 과거 시험을 치고 무진 노력을 했지만, 인연이 없었던지 소망한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다. 오랜 세월 고향을 떠나 유랑생활을 하다가 전직 고관 자제들의 가정교사인 훈장 노릇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훈장 노릇을 하면서 민간에 구전되는 이야기를 모와 ‘요재지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그의 요재지이 책속에 섭소천(聶小倩)이라는 제목의 귀신이야기가 있다.
그 섭소천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이 섭소천 역(役)으로 왕조현 주연의 천녀유혼(倩女幽魂)이다. 포송령, 구우, 김시습 등 신비, 괴기한 이야기를 적은 저자들은 학문의 실력이 출중했지만, 한결같이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고, 불우한 인생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몽중인(夢中人)의 이야기다. 불우한 인생살이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을 꿈속에서라도 이루기 위한 것이었을까. 나는 그들을 좋아한다.그들이 모두 현존하는 인물들이라면, 불원천리하고 그들을 찾아가 밤을 새워 신비한 유음(幽陰)의 이야기를 나누웠을 것이다.
배필의 인연을 만나지 못해서 고민하고 신음하는 남녀가 있는가 하면, 배필의 인연이 너무 많아 행복한 비명을 내지르는 남자도 있다. 포송령은 훈장노릇을 하면서 틈틈히 신비한 이야기를 채집하기 위해서 시골장날에 장터에 멍석을 깔고 깃발에 신비한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에게 담배와 차를 준다, 는 현상(懸賞)의 기(旗)를 내걸었다. 나역시 포송령과 비슷하게 현상을 내걸었다. 전남 영암 월출산 기슭에 살고있는 나의 상좌가 기이한 이야기를 제보해왔다.
한 남자가 네 명의 처를 거느리고, 네 명의 처에서 모두 아들 딸을 낳아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다. 결혼대상의 여자가 없어 중국, 베트남, 필립핀 등 외국에서 어렵살이 돈으로 신부를 사오다시피 하여 결혼을 하는 일부 한국남자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네 명의 부인을 둔 남자의 이야기는 호기심이 대상이 되었다. 나는 상좌의 안내로 그 남자를 만나보았다.
여복많은 남자를 관찰하니 장점이 있었다. 그는 165정도의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에 선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50대 초반의 그 남자는 알정한 직업이 없이 낚시로 소일하는 평범한 남자였다. 그의 큰부인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남매를 두고 있고, 둘째부인은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역시 남매를 두었고, 셋째는 식당을 하며 아들 하나를 두고 있고, 넷째는 다방의 여주인으로서 딸을 하나 기르고 있었다. 네 명의 부인은 신통히도 그 남자의 도움없이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며 자녀들을 키우고 있었다. 남자는 네 명의 부인의 몸에 자녀를 만들어 주고, 한가하게 낚시만 다닐 뿐이었다. 그는 여자들을 번갈아 동침하며 낚시 할 용돈을 받고 있었다.
그는 부인들에게 용돈을 달라는 뜻으로 빈 지갑을 던지며 “이봐, 지갑이 비었어. 쓰레기통에 던져야겠지?”라고 하면 부인들이 하나같이 배시시 웃으며 빈지갑에 지폐를 가득 넣어 준다는 것이었다. 부인들은 모두 그를 사랑했다. 나는 그의 장점을 관찰했다. 도대체 왜 네 명의 여자들이 서로 시기질투로 쟁투(爭鬪)하지 않고 서로를 인정하며 언니, 동생 서열을 지키며 행복하게 사는 것일까? 그 남자는 키가 큰 미남자도 아니요, 돈 잘버는 사업가도 아니다.
남근(男根)이 보통사람과 달리 거대한 것도 아니다. 관찰한 끝에 장점이 보였다. 그는 첫째, 여자를 칭찬하는데 인색치 않았다. 둘째, 여자에게 큰소리를 치지 않았다. 셋째, 여자의 말에 귀울여주었다. 넷째, 여자에게 말할 때에는 마치 귓가에 속삭이듯이 다정하게 나직히 말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네 명의 부인들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고, 귓가에 속삭이듯 사랑을 속삭였다. 그는 여자들과 물고기를 잘 낚는 행복한 낚시꾼이었다.
세상의 남자들이 그 남자처럼 네 가지의 장점이 있다고 해서 여자들이 처첩노릇을 하려고 할까?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고 해서, 돈을 벌어오지 않는다는, 경제문제가 있을 때 칼같이 이혼을 요구하고, 이혼장을 들고 법원으로 달려가는 것이 작금의 일부 여자들의 작태가 아닌가? 그러나 나는 네 명의 부인과 행복하게 사는 그 남자를 보면서, 신비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전생에 네 명의 여자를 처첩으로 두는 인연법을 지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통투(通透) 한다는 것은 부처님처럼 숙명통(宿命通)을 하지 않고는 불가해(不可解)한 일이지만 말이다.
인연불공을 해준 후 남녀가 좋은 인연을 만나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나 행복하게 사는 남녀도 있고, 그 가운에는 불행한 남녀도 있다. 인연불공이 덕인지, 그의 운명인지는 확연히 알 수 없으나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면 기쁘기 한량이 없다. 그러나 반대급부는 언제나 있는 것이다. 내가 아는 노총각은 국내의 처녀와는 도저히 부부인연을 맺을 처녀가 없다는 결론아래 애써 모은 돈으로 중국 연변 처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런데 두 달이 채 안되어 노총각이 내게 달려와 하소연을 했다. 아내로 맞이한 여자가 주민증 발급을 받자 도주해버려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돈만 날렸다며, 인연불공을 해준 나와 부처님을 무진 원망했다. 나는 괜스리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제아무리 부탁을 해와도 인연불공을 해주지 않는다. 개개인이 지은 전생의 업연으로 금생을 사는 남녀들에게 인연불공을 했다고 해서 솔직히 남녀의 행복을 보장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주팔자(四柱八字)에 여명(女命)에 남편이 되는 관(官)이 전무하고, 관을 치는 식상(食傷)만 가득하다면 제아무리 인연불공을 불전에 올린들 배필과 백년해로를 할 수 없는 처량한 신세이다. 남명(男命)도 처첩이 되는 정편재(正偏財)가 전무하고 처첩을 치는 비겁(比劫)이 중중(重重) 하다면, 인연불공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인연불공은 고달픈 중생에게 주는 삶에 희망사항이요, 마음의 의지일 뿐이다. 인연불공에 집착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현세에 이룰 수 없는 꿈은 포송령과 구우, 김시습 등의 한사(寒士)들의 이야기처럼 몽중(夢中)에 성취하면 얼마나 좋을까? 꿈속에 섭소천같은 여인과, 비단 띠로 목조여 비명횡사한 양귀비를 만나 작설차를 마시며 부귀영화가 헛되고, 헛되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 청(淸)의 순치황제(順治皇帝)를 꿈속에서 만나 황위를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출가위승(出家爲僧)하여 법명을 행치(行治)대사로 한 출가의 변(辯)을 듣는 것도 얼마나 좋을까? 나는 이제 풍진세상(風塵世上)에 할일이 다했음을 절감한다. 남한강 강가에 정좌하여 강물을 응시하며 불우한 한사(寒士) 포송령公과 김시습公을 그리워한다.
이법철(bubch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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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불공(因緣佛供)과 꿈속의 행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