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교와 연대한 천주교는 변질된 로만카톨릭이며 변질된 로마카톨릭은 신자들에 의하여 축출되어야 한다
[칼럼리스트 이청성]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정치는 차지하게 하는 자가 차지하는 자 보다 비교우위여야 한다. 이는 직접 민주정치는 물론 대의제 민주정치에서도 갖추어야 할 기본적 틀이며 민주발전의 과정이면서 목적이다. 이 틀에서 벗어난 정치가 바로 지난세기의 전제정치이며, 오늘날에는 지난시기가 무색할 정도의 전제성을 가지고 있는 김일성교를 신봉하는 북녘 세습정권의 무단정치이다.
이미 밝혀진 대로 북녘정권은 근래 유례없는 정교일치, 유일사상 신봉 등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무소불위의 통치기구를 확보하고 있다. 히틀러의 나치당도, 일본 천왕의 군국주의도 결국은 특정 정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오늘 북녘은 중세 종교국가를 능가하는 유일신 신봉 주춧돌 위에 확고히 자리한 종교국가 현대화의 결정판으로써 국제정치에 적응코자 한다. 우리의 허점은 이러한 종교국가의 모순성이나 불합리성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정교일치 국가(?)가 금수강산 북녘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혹여 김일성교가 유사종교 내지는 사이비 종교라고 치부해도 좋다. 하지만 그러한 종교일지라도 어떤 환경에서는 그 규모가 기존의 종교를 뛰어 넘어 성장을 거듭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엿볼 수 있었다. 독버섯이 창궐하여 신선한 버섯을 구축하고, 악화 앞에 양화가 작아지기만 하는 경우와 같다. 오늘 어느 누가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진단을 김일성교와 떼어놓고 이해할 수 있겠는가, 종교간 갈등은 성숙된 종교들을 전제로 한다. 성숙된 종교와 신흥종교는 오히려 갈등을 뛰어 넘어 협력의 틀로써 상생할 수 있는 것이다. 어미 개가 어린 강아지를 보듬고, 이후 강아지가 성장해서는 어미 개와 으르렁거린다. 전자는 상생이요, 후자는 갈등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신흥종교는 정치적 공작을 덧붙일 수 있고, 성숙된 종교는 이를 쉽게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의 활동이 더욱 활성화 일로를 걷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남녘의 기성종교들이 종교적 갈등을 뒤로하면서 김일성교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게 되는 이유이다. 이러한 연유로 천주교, 개신교, 불교 일부단체들의 반국가행위는 단순한 종교계에서의 일탈이 아니다. 김일성교와의 상생을 위한, 정치 목적적 반정부투쟁이다. 종교적 상충이 종교적 이해와 정치적 일치로 승화될 때 거대한 동력으로 표출되는 것은 이미 지난시기 그들의 작용으로 충분히 입증된 바이다. 특히, 천주교는 그들 공동체의 구조적인 첩보채널이 있다. 소위 고해성사 과정에서 각계각층 신도들의 내재한 국가적 사회적 기밀들이 사제들에게 노출된다. 물론 고해성사는 영성으로써 집전하는 종교행사이므로 외부노출은 기우일 뿐이라고 한다. 김일성교의 정치공작을 받아들이는 현실에서 이를 기우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더 큰 문제는 정제되지 않은 입소문을 최상의 진실인 양 이를 곧바로 행동에 옮긴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분별없는 행동성과 김일성교의 대남 정치공작이 어우러지면서 그들의 행동 대오는 국기문란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군사독재에 항거한 천주교, 기층시민들을 어루만져주는 천주교, 작고 적은 곳을 피하지 않는 천주교, 이는 종교의 전교과정이며 생리이다. 이를 두고 감사의 대상, 보은의 대상으로 치부하는 것은 청맹과니의 지나친 자기비하이다. 오늘 천주교는 변질의 굴곡을 성찰해야 만 한다. 천주교는 서세동점의 구한말시기 서학으로 이 땅에 상륙했다.
무분별하고 급진적인 전교시책으로 많은 순교자를 낳았으며 공격적 이념주입으로 동학을 촉발하여 전대미문의 농민운동인 동학난의 시발점을 제공했다. 더욱이 일본 천주교도들은 임진년에 한반도 침공의 선봉에 서서 수많은 겨레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이 땅을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그들의 집요한 약탈로 인하여 겨레는 동족을 살육하여 인육으로 연명하는 끔찍한 지옥의 광장으로 전변되었다, 진정한 종교인들이라면 살육을 재미거리로 일삼고 약탈을 일상으로 자행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광기어린 종교가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총격을 두고는 인간을 살해해서는 안 된다는 교리를 들춰내 천주교 신자 자격을 박탈한다고 했다.
순수종교 입장에서 이러한 모순이 능사인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안중근 의사의 천주교 복귀는 근자에 이르러 뜻있는 천주교인의 도움으로 겨우 이루어질 수 있었다. 금반 박창신 신부의 강론도 허무맹랑하다. 특정 정권을 비방하고 또 다른 정권을 비호하는 사제의 행태는 모순 그 자체이다. 신자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사제가 미사집전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전직 대통령 노무현의 사거를 두고 자살을 인정하지 않는 교리를 비껴가기 위하여 근거도 없이 타살로 인정한다고 한다. 사제가 특정인의 자살을 타살로 인정하면 타살로 바꿔지는가, 중세기 마녀사냥을 일삼던 교황도 벌떡 일어나 웃고 갈만하다. 현 정권을 터무니없는 부정선거로 매도하여 퇴진을 요구면서 대남 정치공작에 전격 편승하는 어처구니없는 행태는 수백만 천주교 신자들을 우롱하는 악행이며 종교적 파문을 불러오는 악수이다. 베트남 패망을 열망한 종교행사에는 승려들의 소신공양이 있다. 이들의 행위를 진정한 종교적 신념으로 만 치부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뉴욕의 9.11테러 사건도 종교적 신념이므로 테러 범주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미국은 사건의 주범을 끈질기게 추적하여 산산 조각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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