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정부는 대한국국제 1조에서 대한제국은 세계만국의 공인되어 온 바 자주 독립하온 제국이니라"고 밝히고 국가의 자주독립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국방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1899년 원수부(元帥府)를 창설하면서 황제가 대원수로 취임하였으며 1902년 경군(京軍)은 친위대(親衛隊)를 2개 연대로 증강하고, 2개 연대의 시위대(侍衛隊)를 창설했으며, 호위군(扈衛軍)도 호위대(扈衛隊)로 증강·개편했다.
지방군도 진위대(鎭衛隊)를 6개 연대로 증강시켜 경기도·경북도·평양과 국경지대에 배치했다.
대한제국(Daehan Empire) 정부는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1902년 국가(國歌)가 제정되고, 1903년 국민개병을 원칙으로 하는 징병제도에 관한 조칙이 내렸다.
고종황제는 해삼위(海蔘威;연해주(沿海州)의 블라디보스토크)·간도(間島) 교민을 보호하기 위해 1902년 해삼위통상사무(海蔘威通商事務)·북간도관리(北間島管理)가 설치하고 이범윤(李範允)을 임명하고, 북간도(北間島)의 영토 편입이 추진되었으며, 1899년 오랫동안 종주권을 주장해 오던 청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해 공사(公使)를 교환했다.
국가의 재정적 기초를 튼튼히 할 양전(量田)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는데 양전사업이 진행되면서 근대적 소유권제도로의 발전을 뜻하는 지계(地契)의 발급도 촉진되었으나 양전사업이 중단되면서 지계발급 사무도 중단됐다.
상공업정책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섬유·철도·농업·운수·광업·상사·금융 부문에 근대적 회사들이 설립하고, 근대 과학기술을 응용한 방직·정미·측량기계와 윤선(輪船) 등이 제조되고 1902년 경제생활의 기준이 되는 도량형에 관한 규칙이 제정되어, 1903년 전국적으로 실시했다.
교육정책은 근대적 상인, 기술자의 양성을 목표로 한 실업교육이 강조되어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기도 했으며 상공학교·광무학교 등 많은 공립실업학교가 세워졌다.
각지에 세워진 많은 사립학교들도 대부분이 실업교육을 표방했다. 통신·교통 시설도 개선되어 우편·전보망이 전국적으로 확충되어갔으며, 서울·인천·개성·평양 등지에 전화가 개설됐다. 철도는 외국인에게 특허되어 외국 기술과 자본에 의해 부설했다. 1899년 종합병원인 광제원(廣濟院)이 설립하고 1900년 순회재판소가 설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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