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현일기자의 시사펀치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5월16일 세월호 유가족들을 청와대에서 면담한 지 4개월 만에 마침내 입을 열었다.박 대통령이 어제 오전 국무회의에서, 오후에 새누리당 대표들을 만나서 한 발언은 국정 책임자로서 할 말이 아니며 국민에 대한 도발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박 대통령은 국무회의 발언 말머리에 “국민을 대신해서 선택받은 국회와 정치권에선 제 기능을 찾고, 그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한다면서 “국회가 제 기능과 역할을 다 하지 못하는 것, 이것은 국민을 의식하지 않고 정치를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누가 누구에게 할 말인지 모르겠다. 똑같은 말을 박 대통령에게 되돌려줘야 제 격 아닐까. “국민을 대신해서 선택받은 대통령과 청와대가 제 기능을 찾고, 그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 대통령이 제 기능과 역할을 다 하지 못하는 것, 이것은 국민을 의식하지 않고 정치를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인 발언이 도를 넘고 있다. 이것은 국민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고 국가의 위상 추락과 외교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이라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4.16 참사 당일 ‘7시간 행적’에 대한 의혹 제기가 대통령에 대한 모독인가. 그 의혹의 진원지가 청와대 김기춘 비서실장의 발언 아니었던가. 박 대통령은 ‘짐이 곧 국가’라고 했던 절대군주 루이 14세처럼 ‘대통령이 곧 국가’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 더구나 10년 전 한나라당 현역 국회의원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쌍욕으로 도배한 연극 <환생경제>를 보면서 박장대소했던 사람이 박 대통령 아니었던가.
나아가 국가의 위상 추락과 외교관계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장본인이 과연 누구인가. 세월호 침몰을 대한민국호의 침몰이라는 대참사로 만들어 국가의 위상을 땅에 추락시키다 못해 바다에 수장시킨 거짓 무능 정부의 총책임자가 과연 누구란 말인가. 사족으로 덧붙인 말이 더욱 가관이다. “가장 모범이 돼야 할 정치권의 이런 발언은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혐오감을 주고 국회의 위상도 크게 떨어뜨릴 것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린가. 이런 발언이 국민에게 혐오감을 주고 대통령의 위상을 실추시키는 것이라고 우리 국민이 박 대통령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박 대통령의 도발적 발언의 백미는 국회의원 세비 반납을 언급한 대목이다. “국회의원 세비는 국민들의 세금으로 나가는 것이므로 국민에 대한 책임을 다할 의무가 있다. 만약에 국민에 대한 의무를 행하지 못할 경우에는 국민에게 그 의무를 반납하고 세비도 돌려드려야 한다.”며 작심하고 발언했다. 국회의원이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주권자인 국민은 백 번이라도 이런 비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럴 자격이 없다. 국민에 대한 책임과 의무의 무게로 따지면 대통령이 국회의원보다 천배 만배 무겁고 세비의 액수로 치자면 국회의원 세비는 대통령의 그것에 비하여 세발의 피도 안 된다. 맨 먼저 국민에게 의무를 반납하고 세비를 돌려줘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박 대통령 자신이다.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그동안 대부분 문제점이 드러났고 … 드러난 문제점들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고 발언한 대목에서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아예 세월호 특별법 자체를 원천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발언이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 서명에 참여한 5백만 국민은 누구이며, 거대 양당이 특별법 협상은 왜 한 것이란 말인가.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안드로메다에 살고 있는가.
박 대통령의 왜곡된 현실인식은 “세월호 특별법도 순수한 유가족들의 마음을 담아야 하고 희생자들의 뜻이 헛되지 않도록 외부세력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발언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순수한 유가족'과 '외부세력'의 이분법이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쉬 짐작이 간다. 진상조사위에 수사권·기소권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은 ‘순수하지 않은 유가족’의 주장이고, 참사의 철저한 진상규명 요구는 ‘정치적 의도를 가진 불순한 외부세력의 소행’이라고 매도하려는 속셈이다.
국회 본청 앞과 광화문 광장에서 60일 넘게 농성을 하고, '언제든 찾아오라'고 했던 대통령의 말을 믿고 청와대 앞에서 추석 명절을 보내면서 26일째 대통령과의 면담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외부세력’이 아니라 세월호 유가족들이다. 이들의 ‘순수한’ 특별법 요구를 왜곡하고 SNS를 통해 마타도어를 퍼뜨려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불순한’ 세력은 다름 아닌 정부 여당이다.
박 대통령은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주자는 주장에 대해 “그것은 삼권분립과 사법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일로 대통령으로서 할 수 없고 결단을 내릴 사안이 아닌 것”이라고 단언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딱 맞다.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는 것, 즉 진상조사위원회 내에 특별검사를 두는 것이 사법체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법률 전문가인 법학자들과 대한변호사협회의 법률검토를 통해 이미 확인됐다. 세월호 가족대책위는 세 차례 새누리당과의 면담을 통해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줄 수 없는 이유가 청와대에 대한 공세가 두렵기 때문이라는 답을 들은 바 있다고 반박했다.
박 대통령은 삼권분립을 운운해놓고선 ‘2차 합의안이 여당의 마지막 결단’이라고 밝혔다. 스스로 자기 말을 부정하고 앞뒤가 안 맞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것 같다. 박 대통령은 어제 오후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이완구 원내대표, 주호영 정책위의장, 김재원 원내수석부대표를 청와대로 불렀다. 이 자리에서 “여야가 추천권을 다 갖고 있는데도 여당이 양보를 해서 어떻게든지 성사시키기 위해서 극단까지 가면서 양보를 한 것”이라면서 “수사권·기소권 문제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못을 박았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가로막고 있는 실체가 박 대통령임을 자복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완구 원내대표는 “일단 명분은 충분히 쌓았다고 보고, 저희는 야당이 참여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더 이상 국회를 공전으로 둘 수 없어서 단호한 입장에서 처리하려고 한다.”고 화답했다. 대통령의 하명이니 어련하겠는가. 새누리당이 '청와대의 여의도 출장소'라는 세간의 조롱이 빈말이 아님을 그대로 보여준다. 대통령의 결단은 세월호 특별법이 아니라 새누리당 단독국회 강행 지시였던 셈이다.
박 대통령이 이번 주말 5일간의 외국순방을 떠난다. 캐나다와 미국 방문, 유엔총회 참석 일정 등이다. 어제 새누리당 지도부를 만난 자리에서도 "외국 방문 중에 국내 문제를 믿고 맡긴다."고 당부했다. 작년의 악몽이 떠오른다. 작년 9월4일 박 대통령이 세 번째 외국순방을 떠나던 날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처리됐다. 현직 국회의원이 ‘내란음모’라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체포 구속되는 일이 벌어졌다. 박 대통령의 다섯 번째 외국순방 중이던 작년 11월5일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가 있었다.
헌정사상 초유의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안을 청구권자인 대통령 부재중에 국무회의에 긴급 상정해 처리한 뒤 대통령이 원격 전자결재를 한 것이다. 박 대통령의 이번 외국방문 중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려나. 세월호 특별법 농성장에 대한 침탈이라도 벌어지는 것은 아닌지. 불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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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님! 국민을 향해 흘린 눈물의 호소는 어디로 갔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