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북핵 합의의 배경은 동북아 안보환경 관련 국가들의 ‘정권이익’이 일치한 데서 온 변화이다. 한국의 노무현 정권과 미국의 부시정권 그리고 체제유지를 최상의 목표로 지닌 북한 김정일 정권의 시한부적 정권 속내’가 2.13 북핵 합의를 나오게 한 배경이다.
부시 정권은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정치ㆍ사회ㆍ경제적 소모와 실패론에 부딪쳐 가장 ‘빠른 성과’를 낼 수 있는 북핵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성과물을 2008년 선거를 앞두고 유권자에게 제시함으로써 ‘정권 재창출’을 하겠다는 현실적인 목표가 있다. 물론 노무현 정권에게도 북한과의 ‘협조관계’를 바탕으로 공들인 대북 포용정책을 통해 2.13 북핵 합의를 이끌면서 성과를 거두겠다는 목적이 있다. 북한 정권은 체제유지를 위해 개발한 북핵이 매우 유용한 카드라는 결론과 함께 미국과의 직거래를 통해 나름대로의 ‘운신의 지대’를 확보하겠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다.
동시에 미국은 동북아안보체제에서 이전과는 판이하게 ‘한국에 대한 비중’을 줄이면서 핵의 완전폐기가 아니라 ‘핵의 전이’를 막는 ‘정치적 타협’선에서 머무르겠다는 카드 역시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주변국의 상황
그러나 주변국의 상황은 매우 복잡하다. 중국은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 가장 분노했고 ‘핵을 가진 북한’에 대해 가장 껄끄럽게 생각하는 국가이다. 반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최, 현격한 국내 경제 격차, 파륜궁을 비롯한 여러 소요, 난동사태의 확산 우려 등 산적한 국내 이슈가 북핵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할 여유가 없는 ‘현실’이 고민스러운 상황이다.
반면 일본은 2.13 북핵합의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나라이다. 무엇보다 북한의 납치 일본인 문제는 전국민의 관심사이자 아베 정권의 명운이 걸린 문제로 부상했기에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 없는 2.13 합의는 쉽사리 수용하기 어렵다. 그러나 고이즈미 정권 이후 동반자 관계로까지 격상된 미ㆍ일관계에 대한 자신감으로 ‘결코 일본인 납치자 문제 해결 없이 미ㆍ북 수교나 평화협정 이행’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아베 총리의 일본군 성노예-종군위안부 문제로 인한 미ㆍ일의 시각차-정확히 말하면 국제적 인식과 일본의 인권에 대한 인식차이로 인해 일본 국내 정치인 사이에서 ‘납치문제와 북핵문제를 별도로 분리하는 정책’을 쓰자는 이야기도 일부 나오고 있다.
3. 2.13합의의 진행과정과 한반도 안전 보장 상황
2.13합의는 만일 북한이 합의문대로 이행만 한다면 불안이 늘 잠재했던 한반도 정세를 ‘평화정착’ 모드로 가져갈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북한이 핵무기를 완전히 폐기하고 개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북한의 2.13합의는 기본적으로 ‘체제 유지’라는 북한 김정일 정권의 목적과 어긋난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김일성 유훈정치로 유지되는 북한 김정일 정권에게 최대의 딜레마는 ‘개방’이다. 개방을 하자니 정권유지가 불가능하고 폐쇄국가로 가자니 ‘생존불가능’한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모순상황에 북한은 봉착해 있다. 북한의 김일성으로부터 김정일에 이르기까지 무려 50년에 걸친 그들의 핵개발은 남북공동성명부터 6.15, 9.19 그리고 2.13 북핵 합의까지 한시도 멈추지 않았고 쉼 없이 추진되었다. 즉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북한이 완패했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면서 북한 김정일 정권은 더욱더 속도를 내어 핵개발에 몰두해왔다. 즉 재래식 무기의 열세를 핵무기를 통해 만회하겠다는 작은 의도와 대외적으로 핵을 가장 강력하고 위협적인 협상카드로 쓰겠다는 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한국은 가장 확실한 표적이었고 북한의 핵카드에 가장 큰 우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끌려 다닌 인질이었다. 핵개발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협하고 협박하면서 북한은 체제유지를 위한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오늘까지 정권을 유지했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확한 현실이다.
미국 부시 정권의 현실에 무릎 꿇은 2.13합의에 대해 노무현 정권은 자신들의 대북정책이 승리한 듯 말하고 있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햇빛정책’의 성과라고 자화자찬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섣부른 판단인 동시에 스스로 오류를 드러내는 언급이다. 우리는 그 햇빛이 굶주리는 북한 주민이 아니라 김정일 정권에게만 따뜻했던 ‘편향적 햇빛’이었음을 잘 알고 있다. 또한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했던 6.15선언은 이미 서해교전을 통해 철저히 부인되었다.
2.13합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정권의 자화자찬과 달리 6자 회담의 틀을 빌려 사실상 미국과 북한이 직접 대화를 시작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미국은 양국간 직접 대화를 통해 대북영향력을 제고하려 하고 있는데, 이것은 향후 예상되는 중국 주도의 동북아시아 질서에 대한 견제 성격도 강하다.
북한 역시 미국과의 직접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북한은 이미 중국의 지원 없이는 자국 경제를 지탱할 수 없다. 때문에 북한은 미국과의 직접 대화를 통해 일방적으로 중국에 쏠리는 힘의 균형을 맞추는 한편, 미ㆍ중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보다 큰 실익을 거두려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은 이 같은 미국과 북한의 관계 변화 속에서 어떤 위치에 처해 있는가? 미국의 경우를 돌아보든, 북한의 경우를 돌아보든 한국은 결국 외톨이 신세로 전락해 소외될 수 밖에 없다. 북한 입장에서 한국은 필요할 때마다 쌀과 비료, 현금을 무상으로 퍼주는 편리한 지원 창구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 입장에서 한국은 대북 관계 개선에 있어 걸리적거리는 우회로일 따름이다. 워싱턴과 평양 사이에 직접대화라는 고속도로가 뚫리는데 한국이라는 우회로를 택할 이유가 전혀 없다. 미국과 북한에 있어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현격히 저하될 것이며 이는 곧 한ㆍ미동맹의 붕괴와 국가 안보 위협으로 이어질 것이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한국과 미국 모두 대선이 임박해 있다는 점이다. 정치ㆍ경제ㆍ사회ㆍ외교 등 각 분야에서 총체적 실패 성적표를 받아든 노무현 정권과 이라크전 수렁 속에 중간선거까지 참패당한 부시 정권의 처지는 흡사하다. 두 정권은 대선을 앞두고 국민들에게 내보일 가시적 성과물이 필요하기에 경쟁적으로 북한 문제에 몰두하고 있다. 걸핏하면 벼랑끝 전술을 구사하며 약속파기를 일삼는 북한은 대단히 어려운 협상 상대이다. 그런데 현재 한ㆍ미 양국의 대북 접근은 지나치게 과열된 양상을 띄고 있다. 이미 우리 정부는 2.13 합의에 흥분한 나머지 대북 지원용 중유 5만톤 계약부터 맺었다가 36억원의 세금을 허공에 날려버렸다. 대선을 앞두고 마음 급한 정권이 얼마나 졸속으로 북한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지 생생히 보여주는 사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권은 올 한해 대대적인 ‘대북 퍼포먼스’들을 계속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6월 15일을 즈음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 납북자, 국군포로 일부를 전시용으로 송환해 남북 화해 모드를 고조시키고, 8월 15일 무렵에는 남ㆍ북 정상회담 혹은 남ㆍ북ㆍ미ㆍ중 4자 정상회담을 개최해 ‘한반도 냉전 종식, 평화 정착’을 공식적으로 선언할 것이라는 등 여러 시나리오들이 제기되고 있다.
노무현 정권의 대북 퍼포먼스는 미국 부시 정권에게도 이라크전 실패를 만회할 좋은 기회이다. 한반도 문제의 급진적 변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만신창이로 전락한 대외 정책 분야에서의 성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한반도에서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지 냉정히 다시 검토해야 한다. 어제의 적과 동지가 반드시 오늘의 적과 동지는 아니다.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혁신적 발상이다. 그리고 그 발상의 기준은 위장된 평화 공세나 감성적인 민족주의가 아니라 철저히 대한민국의 국익이 되어야 한다.
찰스 다윈은 ‘가장 강한 종은 다름 아닌 적응하는 종’이라고 이야기했다.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종은 도태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국가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4. 한나라당의 대북정책 변화
북한 실체 인정, 전작권 합의 실체 인정, 개성공단 적극 지원, 남북 상호 대표부 설치 등이 최근 한나라당의 새 대북정책 초안으로 일부 언론에 소개되면서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이것은 송영선 의원의 개인적 의견에 불과했으며 당에서 어떤 내부 검토도 거치지 않은 상태였다. 이 파문으로 송영선 의원은 결국 대북정책 태스크포스팀에서 물러나야 했다.
물론 한반도 정세 변화에 발맞춰 한나라당의 대북정책도 변화해야 한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지켜온 기본 대북원칙은 결코 변할 수 없고 그것은 김정일 독재 정권과 고통받는 북한 주민을 분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급변하는 정세 속에 이 같은 기본 원칙은 유지하되, 전략 전술은 변화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목표는 우리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보장하고 한반도 전체의 풍요를 지향해야 한다.
한나라당 대북정책의 기초는 <디자인된 통일정책>이다. 우리의 통일정책은 경제적인 접근을 바탕으로 북한의 개혁과 개방을 유도해야 한다. 또한 한반도에서 발생 가능한 여러 상황들을 고려해 여러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한다.
또한 한나라당의 대북정책은 북한 주민에 대해서는 인도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특히 선군정치를 앞세운 김정일 독재 정권 치하에서 어린이ㆍ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은 의료ㆍ교육ㆍ식량 문제에서 후순위로 밀려나고 있다. 한나라당의 대북정책은 이들에 대한 지원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지원에 대해서도 철저한 상호주의 원칙이 적용된다. 우리의 인도적 지원에 대해 북한 역시 단순한 만남의 차원을 넘은 이산가족 교류, 납북자ㆍ국군포로 송환 등 구체적인 조치로 답해야 한다. 또한 이 지원은 반드시 투명한 검증이 보장되어야 한다. 김정일 독재정권이 아니라 북한 주민을 돕기 위한 지원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북한 문제를 놓고 미국, 일본, 중국, EU 등과 보다 적극적인 외교적 접촉을 강화해야 한다. 최근의 미ㆍ북 관계처럼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성과에 급급하기보다는, 체제 변화와 인권 등 근본적인 지점을 돌아보는 보다 업그레이드된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통일은 잘 디자인된 정책에 따라 원칙을 지키며 만들어나가는 통일이어야 한다. 앞으로 10~15년에 걸쳐 시행될 통일정책을 디자인하고, 북한이 개혁 개방에 익숙해지도록 이끌어야 한다. 특히 이 부분에서, 수많은 탈북자들이야말로 통일정책 구현에 있어 큰 자산이다. 대한민국과 북한 두 체제를 모두 경험한 이들이 북한 주민들의 길잡이가 되어 북한의 성공적인 체제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노무현 정권은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몰두한 나머지 아무 공적 직위도 없는 대통령의 지인까지 대북 특사로 삼았다. 이 같은 깜짝 이벤트 위주의 ‘통일쇼’는 폐기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국익과 안보, 북한 주민들의 인권ㆍ풍요를 우선으로 하는 거시적 안목과 정교한 디자인의 통일정책에 의해 대한민국은 한반도를 넘어 세계로 도약하는 진정한 의미의 통일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2.13 북핵 합의와 한나라당의 대북정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