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원고는 31년간의 검찰수사관 생활을 마치고 집행관으로 제2의 인생을 보냈던 기원섭 前검찰부이사관의 1,000일간의 집행관 생활을 하루하루 기록한 ‘집행관 일기(오푸스)’를 원문으로 하여 연재하고 있습니다.
그의 글을 통해 벼랑끝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과 喜怒哀樂이 있는 우리 이웃의 삶의 모습을 엿보면서 작지만 따뜻한 희망의 불씨를 찾고자 합니다.
- 편집자 주 -
기원섭 前 검찰부이사관
“아버지! 사는 게 그렇잖아요. 서있고 싶지 않은 곳에 서있어야 하는 경우 말입니다. 오늘 아버지는 그런 자리에 서계셨어요. 바로 우리 가족들을 위해서 그러셨잖아요.”
한 겨울의 추위가 아직 덜 가신 어느 해 2월, 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의 현장에서, 하루 종일을 그 덜 가신 추위에 떨다가, 그날 자정이 막 넘어선 시! 간에, 지치고 허무한 마음으로 현관문에 들어서자, 맏이가 애비인 저를 위로하며 다가섰습니다.
맏이의 등 뒤로, 한 지붕 아래서 한 솥밥 먹고 사는, 제 아내와 막내와 그리고 장모님의 걱정스러운 얼굴도 있었습니다.
울컥 가슴에서 치솟는 뿌듯한 감동이, 결국 제 두 눈에 눈물을 고이게 하고 말았습니다. 가족들이 제 역할을 값있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저를 감동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서있고 싶지 않은 자리가 아니라 스스로 서있어야 할 자리를 선택했을 뿐입니다. 제가 만약 그런 자리에 서려하지 않는다면 덤터기를 쓰는 누군가가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이고, 서있어야 할 자리를 피해간 저는 곧바로 비겁자가 되어 버렸을 겁니다.
돌이켜 보면 제가 몸담았던 31년 9개월 동안의 검찰 생활은 바로 그날처럼 스스로 서있어야 할 자리를 찾는 긴장된 선택으로 점철된 날들이었습니다.
그 이후 한 해 남짓 지나서, 저는 검찰청 국장직 승진 기회를 미련 없이 버리고 집행관이라는 미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집행관은 오랜 민사적 갈등으로 벼랑 끝까지 내몰린 당사자들 사이에 끼어들어, 그들의 해묵은 다툼을 끝맺음하는 너무나 고단한 일을 감당하는 신분입니다.
이런 어려운 역할을 서슴없이 선택했던 이유는, 제 인생 2막의 의미를 ‘집행관’이라는 역할 속에서 열심히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삶 이미 힘들어 졌지만, 그래도 뭔가 도울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거야.”
물론 날선 다툼의 현장에서 사람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칠 때마다 ‘내가 왜 집행관이라는 신분을 선택했을까?’하는 자조 섞인 후회가 밀려올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맏이가 했던 격려의 말을 떠올리며, ‘스스로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선택했던 마음으로 후딱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렇게 한 건 한 건 벼랑 끝 같은 집행 현장을 뛰어다니며, ‘다툼’이라는 껍데기를 마음의 눈으로 벗겨내다 보니, 그 속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따뜻한 인간애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인생의 고단한 현장들에 서면, 세상이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살벌하고 차갑게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이 하나로 어울리는 푸근한 세상도 있더라는 겁니다.
평소 검찰 내부통신망인 ‘e-pros’공간에 틈틈이 글을 써왔던 저는, 그 감동을 제 마음속에만 묵혀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행관인 저의 하루하루를 그때그때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집행관의 신분에 들어서기 전부터, 저의 내심에서 작정했던 것일 런지도 모릅니다.
우리 주위 그 어디선가, 시린 아픔을 겪고 상처 입은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힘들어 하는 분들이, 이젠 없어지기를 바라는 제 마음을 ‘집행관일지’라는 그 기록 하나하나에 담았습니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저의 첫 번째 집행관일지의 소재는, 집행현장에서 만난 어느 소녀의 휘파람소리였습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시는걸 보니 세상을 참 편하게 사시는 분 같습니다.”
동네 목욕탕 이발사 아저씨한테 그렇게 칭찬을 받고 참 기분 좋은 아침을 시작했던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휘~휘~휘~
이사비용을 더 받겠다고 주저앉아 버티는 사무실을 명도집행을 한 바로 그 인근에서, 일행과 함께 5,000원짜리 청국장 집에서 점심 한 끼 때우고 있는데, 어디선가 그렇게 가냘픈 휘파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세상 경험이 부족한 새파란 젊은이라면 몰라도, 나이도 지긋한 어른이 그 몇 푼의 이사비용을 더 받겠다고 억지 주장을 하던 모습이 자꾸 떠올라, 밥맛마저 없으려니 하는 판에 들려오는 그 휘파람소리는, 제게 신선한 귀동냥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씨팔! 나, 못나가! 내 몸에 손만 대봐! 고소해 버릴 테니까!”
“씨팔이라니! 어디다 대고 함부로 욕하는 거요?”
욕지거리를 섞어 우격다짐으로 대들던 채무자의 거친 음성과, 이에 대응하던 제 자신의 거친 음성이 섞여 얹혀 더럽혀진 제 귓전이, 그 휘파람소리에 씻겨 지는듯했습니다.
끊어졌다가 이어지고 이어졌다가 또 끊어지고, 이렇게 여러 차례 휘파람소리가 반복되는 가운데, 우리들의 점심은 끝이 나고, 그 음식점 문밖을 나서는 순간이었습니다.
휘~휘~휘~
휘파람소리는 더 또렷해지고 있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휘파람소리의 원천은 바로 그 음식점 문간이었습니다.
일곱 살이나 여덟 살이나 됐을까 싶은 어린 소녀가, 그 문간 기둥에 기대어 서서 그렇게 휘파람을 불고 있었던 것입니다.
휘파람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지고 했던 것은, 그 소녀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세게 불었다 약하게 불었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눈치를 보는 소녀의 눈빛이, 저를 보자 새롭게 반짝 빛났습니다.
문득, 수년 전의 영화 ‘게이샤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가난한 어부의 아홉 살짜리 딸 ‘치요’의 천진난만한 그 모습과, 푸르고 초롱초롱한 그 눈빛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꼭 그만한 나이에, 꼭 그런 모습과 눈빛을 가진 어린 소녀가, 두 손을 뒤로하여 맞잡아 뒷짐 진 모습으로, 그렇게 앙증맞은 휘파람을 불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라?”
놀라는 제 모습을, 그 소녀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불던 휘파람을 그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 소리만 좀 잦아들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들린 휘파람 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너였어?”
휘~휘~휘~
그 소녀는 저의 물음에 대꾸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살금살금 휘파람만 불고 있었습니다.
조심스러워하는 그 소녀의 모습에서, 전 하나의 섬뜩한 전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점심시간 전에 있었던, 그 명도집행 현장에서 좀 거칠게 다가갔던 제 모습을, 혹 그 소녀에게 들켰나하는 의구심이 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 그런 척,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야 했습니다.
“어찌 그리도 휘파람소리가 곱냐?”
휘~휘~휘~
역시 매 한가지로 말이 없었습니다.
“얼굴이 고우니 휘파람소리도 곱구나. 아마 넌 마음씨도 참 곱겠다.”
휘~휘~휘~
살금살금 부는 그 휘파람소리만 여전할 뿐이었습니다.
뭔가 그 소녀의 답 한마디 들으려고 여러 마디 칭찬을 하고 있음에도, 그 소녀는 말똥말똥한 두 눈으로 저를 쳐다보면서, 불던 휘파람만 계속 불고 있었을 뿐입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까 보다 입술을 더 동그랗게 오므려 휘파람소리를 조금 더 크게 내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심정적으로 접근하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휘파람소리를 더 크게 내는 그것으로, 그 소녀가 마음의 문을 서서히 열고 있음을 짐작했습니다.
거기까지로 충분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래! 그래! 알았다. 넌 커서도 참 예쁘겠다. 난 이제 그만 간데이...”
여운이 담긴 그 한마디 남기고 돌아서는 저의 등 뒤로, 그 소녀의 휘파람소리는 더 크게 더 크게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휘~휘~휘~
2006년 3월 11일에 처음으로 쓰는 ‘집행관 기원섭’의 집행관일지는, 이렇게 소녀의 휘파람소리 하나로, 집행관인 제 자신의 마음을 추스른 내용으로 감히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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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휘파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