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조선 수군이 승리한 한산도 해전과 당포 해전에서는 거북선이 먼저 돌진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쏘아대어 적의 배를 모조리 불살라버렸고 1595년 비변사에서 거북선이 해전에서의 승리에 요긴한 것이고 적이 가장 꺼리는 것이므로 경상도와 전라도의 방어를 위해 거북선의 제조를 서둘러야 한다고 건의하였으며 거북선은 판옥선이 사수와 격군의 125명 정도를 수용하는 데 비해 적게 수용되기 때문에 주로 각 영에 1척씩만을 배치하여 선봉으로 삼았다.
조선 군함 거북선의 구조는 선상(船上)을 대판(大板)으로 덮고 판상(板上)에는 송곳으로 덮어 발을 붙일 수 없게 하였다. 용 머리와 거북 꼬리에는 총안을 만들어 대적 공격을 가능하게 하고 적을 만났을 때에는 곧 지붕을 덮고 송곳으로 에워싸서 선봉을 설 수 있다. 또 적선에 오르고자 할 때에는 송곳을 떼게 되었으며 적선에게 포위당하면 일시에 발사할 수 있는 구조였고 거북선의 지붕은 철갑으로 덮여 있어 조총이나 화살 등의 공격을 막는 데 뛰어났다.
선체의 좌우에는 각각 22개의 포혈(砲穴)과 12개씩의 출입문이 있었으며 선내의 왼편 포판 위에는 함장실이 있고, 오른쪽 포판 위에는 장교실이 있으며 좌우 포판 아래에는 24개의 방을 두어 철물고·무기고·사병 휴게실로 썼다.
배의 좌우에는 10개씩의 노가 있어 이것으로 운행하기 때문에 그 속력이 매우 빨랐으며 전후좌우로 화포가 설치되었고 용머리에도 화포가 설치되었다. 거북선은 배 아래쪽에 용 모양을 한 돌기가 설치되어 함대의 선두에서 돌격선 역할을 맡았다.
대포가 설치된 선창의 아래층에는 좌우 각각 10착(捉)의 노와 노를 젓는 격군이 배치되었는데 1착의 노에 4명씩의 격군이 배치되고 사공(沙工)·무상(舞上)이 각각 1명씩 배치되어 82명이 한조를 이루었다.
배 아랫부분은 평평한 평저형이므로 한반도의 남해, 서해와 같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곳에서 기동하기에 알맞았으며 이동 중에도 급속으로 180도 회전이나 좌 우측으로 방향 전환이 가능하여 학익진과 같은 다양한 해상의 기동 진법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다.
태종 원년(1401)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崔海山)이 군기주부로 발탁되었고, 태종 4년 군기감별군(軍器監別軍)이 편성되고 화통군(火通軍)이 증원되었으며 태종 7년 화약의 성능이 두 배로 증가하였고, 태종 9년 철령전(鐵翎箭) 수십 개씩을 장탄한 동통(銅通) 등을 수레에 싣고 달리면서 화약으로 발사하는 화차(火車)가 제작됐다.
태종 13년(1413) 경에는 크기가 다른 세 가지 완구(碗) 20문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돌로 만든 탄환을 발사하는 것으로 명나라 초에 만들어진 잔석포(盞砲)를 본떠서 만든 화포하고 사거리는 150보 정도였다. 완구는 계속 발전하여 조선 중기에 이르면 이서(李曙)의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 완구조(碗條)에는 대완구·중완구·소완구·소소완구 등으로 종류가 늘어나고 사거리도 350~500보에 이르게 된다.
선조 대에 군기시(軍器寺)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 만든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는 바로 이 대완구(大碗)로 발사하는 인마살상과 공성(攻城)을 겸한 무기였다.겉은 무쇠로 둥근 박과 같고 속에는 나무에 도화선을 감는 목곡(木谷)을 파고 그 목곡이 들어갈 죽통(竹筒), 그리고 쇳조각인 빙철(馮鐵)과 화약이 들어 있는데, 목곡의 흠을 늘이면 도화선이 길어져 폭파시간이 길어지고, 줄이면 짧아진다.
비격진천뢰를 대완구(大碗)에 장전한 후 도화선에 점화하고 대완구 혈선에 점화 발사하면 목표지점에 탄착(彈着)하여 폭파하는 폭발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포탄이었다.대완구로 비격진천뢰를 쏘아 성안으로 날려 보내면, 원하는 시간에 폭발하여 빙철의 쇳조각이 사방으로 날아 밀집한 적군을 한꺼번에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것으로 뛰어난 살상효과와 심각한 공포감을 주는 훌륭한 공성(攻城)용 화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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