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던 갑오개혁(1894-1896)이 외국의 간섭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나라의 자주독립 또한 이루지 못했다.
한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외국의 간섭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을 세우게 됐다.
1897년 화강석을 쌓아 만든 독립문의 중앙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홍예문의 가운데 이맛돌에는 이화문장(자두꽃 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위의 앞뒤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 글씨와 양 옆에 태극기(太極旗)가 새겨져 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895년 경복궁을 습격해 고조 광무제와 대신들을 연금하고 건청궁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전대미문의 만행을 저지르자 고조 광무제는 1896년 2월 11일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한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조 광무제는 1897년 2월 외국 공사관과 가까운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했다.
중명전(重明殿)은 서양 건축양식의 황실도서관이며 1904년 경운궁에 화재가 일어나자 고조 광무제는 경운궁의 함녕전에서 중명전(重明殿)으로 거처를 옮겼고 1907년 7월 일제의 강요로 황제위에서 물러날 때까지 국사를 처리했다. 일제는 1905년 11월 17일 중명전에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위임하는 불법 무효한 을사늑약을 강제했다.
을사늑약 이후 외교권을 잃은 대한제국은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제의 강박에 의한 을사늑약의 무효를 국제사회에 알릴 기회라 판단한 고조 광무제가 1907년 4월 중명전을 찾은 이준에게 러시아 황제에게 회의 참석을 주선해달라는 내용이 적힌 친서를 전달했다. 석조전(가칭)은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의 편전 겸 침전으로 건립된 서양식 근대건축물이며 대한제국 황실 궁내부가 1900년 착공하고 1909년 완공해 1919년까지 대한제국 황궁으로 사용하였고 석조전 1층은 상궁 처소·주방 등 시종들의 공간, 2층은 접견실·귀빈실·홀 등 집무 공간, 3층은 침실·욕실·알현실 등 고조 광무제의 공간이다.
석조전(가칭)은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고문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영국인 기사인 하딩이 설계하고 건축 기사 심의석(沈宜錫)이 전체적인 공사를 감독했으며 1904년 이후 영국인 데이비슨이 석조전 공사 감독을 맡았다. 완벽한 좌우 대칭의 석조전은 고전주의 양식을 채택, 이오니아식 기둥이 상부를 떠받치고 있다.
정관헌(靜觀軒)은 태조,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순종 융희제의 어진을 봉안하였으며 경운궁 안에 지은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고 정면 7칸 측면 5칸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었으며, 정면과 좌·우측 발코니가 화려하게 꾸며져 있고, 회색과 붉은색 벽돌로 벽면이 다양하게 장식되어 있는 서양 건축 양식에 전통 목조 건축 요소가 가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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