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간섭(1895) 이후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명성황후(明成皇后)는 친러·친미 정책을 추진하여 10월 민영환(閔泳煥)을 주미 전권공사로 임명하고 미군 장교 다이가 훈련시킨 시위대(侍衛隊)를 중용하며 친러계 이범진(李範晉)을 등용하는 등 배일정책을 강화했다.
이토 히로부미 일본 총리는 한반도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미우라를 주한 일본 공사로 임명하였고 명성황후의 영향력을 제거할 방책을 모색한 미우라 주한 일본 공사는 일본 군대,경찰관과 훈련대 간부 우범선(禹範善)을 포섭하여 1895년 8월 20일 새벽 경복궁을 공격하여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을 살해(殺害)했다.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명성황후가 부국강병 근대화를 추진한 건청궁(乾淸宮)에 난입하여 궁내부대신 이경직(李景稙)을 살해한 뒤, 곤녕합(坤寧閤)에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무참하게 살해(殺害)했을 뿐만 아니라 증거를 없애기 위해 녹산(鹿山)에 시신을 화장하는 야만적 행동을 저질렀고 고조 광무제, 러시아인 사바찐, 미국인 다이 등 목격자가 많아 사건의 은폐에 실패했다.
만행을 목격한 외국인들은 외교관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폭로했고 미국공사대리 알렌과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각각 군병들을 동원하여 시위를 하는 한편, 각국 공사의 회합 후 일본의 관여사실과 폐위 불인정을 발표했다.
고조 광무제와 명성황후의 동원이실합봉릉(同原二室合封陵) 홍릉(洪陵)은 1897년 11월 22일 명성황후(明成皇后) 국장(國葬)을 거행하고 청량리 천장산(天藏山)에 안장됐다가 1919년 1월 21일 고조 광무제가 붕어(崩御)하자 그 해 3월 4일 남양주 금곡으로 이장해 고조 광무제와 함께 합장했다.
홍릉(洪陵)은 신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어도가 설치되어 참도(參道)가 3개의 단으로 되어 있고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침전(寢殿)의 정면에 설치되어 있어 홍전문과 직선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참도와 침전 사이에 문인석, 무인석,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말이 순서대로 참도(參道)의 양쪽으로 정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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