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목 :
순종황제 붕어(崩御)가 6·10 대한광복운동 촉발
1927년 신간회·근우회의 조직과 1929년 11·3 대한광복운동에 영향 김민수 서울 종로 체부동
순종은 1874년 고종과 명성황후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1875년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로 격상되었다.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 이후, 일제와 친일매국노의 강박으로 고종이 강제로 제위에서 물러나자 제위에 올라 연호를 융희(隆熙)라 하였다.
일제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한반도에서 다른 제국주의 열강 세력을 몰아내고 대한제국의 후견국을 자처하며 통감부를 설치하고 1909년 9월 4일 만주 이권을 얻기 위해 이범윤 간도관리사가 관리한 대한국령 간도를 청에 불법 양도했다.
1910년 일제는 순종에게 대한국을 불법 병탄하는 경술늑약에 공식적으로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으나 순종은 조약 늑결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으며, 총리대신 이완용이 이에 대신 서명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제에 불법 병탄되었으며,순종황제는 1926년 붕어(崩御)하였다.
1926년 6월 10일 대한제국의 2대 황제 순종의 인산(因山)일을 기해 일어난 6·10 대한광복운동은 3·1 대한광복운동을 잇는 거국적·범민족적인 대한광복운동으로,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고종황제의 붕어로 촉발된 3·1 대한광복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철저한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연희전문 이병립, 박하균, 중앙고보 이광호, 경성대학 이천진, 천도교 박내원, 권동진, 사회주의계 권오설, 김단야, 이지탁, 인쇄 직공 민창식, 이용재는 순종의 상여가 지날 때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일제 타도," "토지는 농민에게," "8시간 노동," "우리의 교육은 우리 손에" 를 내용으로 한 격문(檄文)을 살포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했다.
6월 10일 순종의 인산에 참가한 학생은 2만 4000여 명이었다. 6·10 대한광복운동은 거국적으로 확대되어 홍성, 고창, 원산, 개성, 평양, 강경, 대구, 공주에서 대규모의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났으며, 1927년 신간회·근우회의 조직과 1929년 11·3 대한광복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대한국의 주권과 영토를 되찾아 1910년 경술늑약(庚戌勒約)으로 불법 병탄(倂呑)당한 대한국의 국권을 회복하는 광복(光復)을 하였으며 민주공화제의 자주독립적인 대한민국 서울정부가 수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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