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문(惠化門)은 태조 5년 도성을 축조할 때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으나, 성종 15년(1484)에 창경궁을 건축하고, 그 정문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여 문 이름의 혼동이 일어나므로, 중종 6년(1511)에 이르러 동소문을 혜화문(惠化門)으로 개칭했다.
그리고 동소문은 문종 원년에 경기 · 충청 · 전라도의 당령 수군을 동원하여 도성을 수축할 때 약간 수리하고, 그 이후 동소문은 순조 16년에 중수하고, 고종 6년에 보수했다. 1928년 문루가 크게 퇴락하였으므로 문루를 헐어 버리고 홍예만 남았었는데 1994년 복원했다.
소의문(昭義門)은 서대문과 남대문 사이 서소문동에 위치하던 서남간문(西南間門)으로 창건 당시 문 이름을 소덕문(昭德門)이라 하였으며,지대가 낮기 때문에 태조 때 토성을 쌓았던 곳이며, 세종 4년에 이것은 석성으로 개축하고 영조 14년(1738)에 소덕문의 석문 즉 홍예(虹霓)를 개축하고, 20년(1744)에 문루를 건축한 뒤 문 이름을 소의문(昭義門)으로 고쳤다.
소덕문은 영조 20년에 재건함과 동시에 문 이름을 소의문으로 고쳐 대한제국에 이르렀으나,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하여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됐다.
광희문(光熙門)은 태조 때에 도성을 창축하면서 홍예(虹霓)와 문루(門樓)를 건설하는데 지대가 낮기 때문에 태조 때 토성을 쌓았던 곳이며 세종 때 석성으로 개축했다.
광희문(光熙門)은 숙종 37년(1711) 도성을 수축(修築)할 때 새로 홍예(虹霓)를 건축하고 9년 후인 45년에 문루를 건축하고 광희문(光熙門)이란 현판을 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이 문은 언제 무너졌는지 알 수 없으나, 석문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 도성 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했다.
창의문(彰義門)은 태종 13년 폐쇄하고 사람의 통행을 금했으나, 세종 28년 왕명을 받아서 출입하는 외에는 닫으라 하고,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던 날 혜화문과 창의문을 닫으라는 명령을 내려 창의문은 닫지 아니하고 열어서 사람을 통행시킨 듯 하고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있던 날 즉 1623년 3월 13일 밤 홍제원에 집결한 의군(義軍)이 창의문을 부수고 서울에 들어와 혁명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영조 17년(1741)에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창의문의 성문과 초루(廊樓)를 개건하고, 인조반정 공신인 정사공신(靖社功臣)의 성명을 새겨서 문루에 걸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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