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대검의 홍보 우먼(?) 김진숙 선배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김진숙 부장님은 검사 임관시절부터 여자검사 특수통으로 알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어울리지 않다 싶었던 홍보일도 맡아서 슈렉의 피오나처럼 변신한 선배님이다. 하여튼 총장님이 여자검사들만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주시니 참가하라는 말씀이셨다. 김진숙 부장님의 제의를 거절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늘 같으신(?) 총장님이 마련해주신 자리라는데 구세대인 나로서는 당연히 o.k였다. 그러나 다음으론 슬슬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바쁜 시국에 다른 남(男)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서울지검에서 평검사 중 가장 나이가 많아 왕언니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다른 바쁜 새내기 여(女)를 독려해서 가볼 것인가.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 지 모르게 세미나하는 날짜가 다가왔다. 직속 상관이자 누구보다도 일에 열정적인 강찬우 부장님께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내보았다. “저... 제가 꼭 가겠다는 것은 아니고요. 김진숙 부장님이 고참 여검사니까 꼭 오라는 청이 있어서요” 비겁하게 꺼낸 말이 부끄럽게 눈을 잠시 돌리시면서 웃으시더니 “잘 다녀오라”고 하셨다. 에고 에고.. 거짓말한 게 들통난 거 맞지...”
그리고도 다른 男들의 질시와 성차별(?) 논란에 휘말리기 싫어서 쉬쉬하며 참가하는 그날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급기야 세미나 개최 며칠 전 닫혔던 입이 참지 못하고 열리고야 말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역시나 男들의 반응은 싸늘하게 “남자검사 연찬회는 안하냐”고 했지만 어쩐지 수업시간 빼먹고 놀러가는 초등학생 마냥 떠나는 그날은 정말 설레었다. 운전에 익숙하지 않은 터라, 모르는 척 결례를 무릅쓰고 우리청 박계현 부부장님의 차에 몸을 실었다. 뒤에 철모르는 초임 2명을 태운채... 박계현 부부장님이 초임 여검사들을 차에 태우시면서 배려하시는 모습은 꼭 딸 대하듯 다정하다. 그렇게 여성스럽고 여린 몸매에 운전 솜씨는 정말 의외? 운전대와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있는 자세에서는 여유가 느껴졌고, 한 손으로 다른 차를 추월하는 묘기까지.. 여린 몸 어디에서 저런 과감한 플레이가 나오는지. 뒤에 앉은 초임이자 초보운전자인 최지현 검사(36기)는 부러움에 연신 감탄사를 뿜어냈다.
드디어 전국 여검사 세미나가 시작되었다. 월말을 끝내고 떠나는 기분들과 무거운 사건에서 해방된 홀가분함이 가랑비에 더욱 푸르게 젖어드는 숲을 느끼는 순간 자유로움과 여유로움으로 바뀌었다. 그 당시 미제에 허덕였을 남(男)들은 절대 이 대목 잊어주시길...
장소는 양지 파인리조트였다. 그날은 유치부 여름캠프가 있었는지 수십명의 아이들이 줄지어서 나타났다. 집에 남기고 온 딸애 얼굴이 잠시 나타났다 사라졌다. 언제나 그렇듯이.. 세미나장 밖에는 열심히 명찰을 챙기시는 김진숙 부장님의 상기된 표정이 있었다. 뭔가 도와드리고 싶었지만 별로 도와줄 수 없었다. 명찰만 달랑 받아가지고 지정석에 가서 앉아 있는데 조금 부피가 있는 선물이 눈에 띄었다.
물론 부피로 보아서 별로 비싸지 않을 것으로 짐작이 되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배려하셨구나하는 생각이 드니까 조금전 상기된 표정이 이해가 되는 듯 싶었다. 조금 기다리자 안인희 교수의 서양사 강의가 시작되었다. 구닥다리 구세대로서 나시에 아주 편안 옷차림의 낯선 여인네를 발견하고 검찰도 많이 변했구나하고 쯧쯧하고 혀를 차고 있었는데 그 분이 바로 안인희 교수라는 것을 안 순간 ‘밖에 있는 여인네들은 멋있게 사네’로 생각이 금방 바뀌었다.
북유럽의 신화와 바그너’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이젠 너무나 익숙한 반지의 제왕에 모티브가 된 신화얘기가 나왔다, 안인희 교수는 약간의 비음이 섞인 매력적인 목소리의 소유자로서 강의내용을 듣는 동안 북유럽의 낭만과 정취가 그대로 베어오는 듯하게 열정적으로 강의했다. 오페라도 한 소절 들려주시고 맨 마지막에 정말 들려주고 싶었던 대목이 있었던 것 같은데 불행히도 리조트측의 음향시설 부족인지 교수님의 기계문명 소홀 탓인지 결국 듣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리고 식사장소로 이동, 아마 밖에서 바비큐파티를 계획하셨던 것 같은데, 때마침 비가 오는 까닭에 건물 식당 안으로 들어와 만찬을 하게 되었다. 깔끔하게 차려진 배치도와 하얀테이블 보위에 놓여진 찌게와 반찬, 다들 예사롭게 장만된 것이 아님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우뢰와 같은 폭발적인 박수 속에 총장님이 도착하셨다. 아마 총장님은 알고도 모르시리라, 우리가 그 박수를 얼마나 재미있게 준비한 것인지를... 총장님은 오시자마자 시원하게 우리 맥주부터 합시다라고 시작하셨다. 순간 긴장감이 느슨해지면서 어렵게만 느껴졌던 총장님이 오히려 가깝게 다가오시는 것 같았다. 총장님은 그냥 부담 없이 재미있게 보내라고 하셨다. 테이블마다 도시면서 검사 한명 한명을 애정 있게 보시는 것 같아서 한쪽 맘에 아린 부분도 있었다. 왜 일까...
총장님 기대에 한껏 부응해서 총장님께서 가신 뒤에는 콘도 아래에 있는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마 이렇게 아리따운 여인네들이 많이 방문한 것은 개업이래로 처음이 아닐까. 짐짓 놀라며 들어오는 남자손님들을 모른 척 하면서 우리끼리의 잔치를 열었다. 후배들의 재롱을 보면서 새삼 우리부 검사님들에게 미안한 감도 들었다. 이리도 재기발랄하고 멋진 검사님들이 많은데 나랑 함께 생활하느라 얼마나 재미없었을까. 돌아가면 잘해주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때뿐이지만 말이다.^^
여흥을 마치고 삼삼오오 작업복을 던지고 편안한 옷차림으로 우리의 정신적 지주이신 조희진 부장님 침실로 모여들었다. 빙 둘러앉으니 그 넓던 거실이 꽉 채워지고, 우리만의 얘기를 나누었다. 주로 후배들의 애로사항을 듣고 선배들이 조언해주는...얼마나 기다리던 시간인가. 지금부터는 정말 남(男)에게 못할 얘기다. 궁금해하시지 말기를... 새벽 4시까지 진지한 얘기, 웃기는 얘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자리를 정리하면서 졸린 눈을 부비며 일어나려는 데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갑자기 뒤통수에서 “시니어 다 모여”라는 선배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로부터 1시간 30분 뒤 모두 지쳐서 잠들 때까지 언제 다시 이런 모임을 할 수 있을지 기약하지 못하지만 오직 우리 세대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특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아련한 아쉬움을 간직한 채 잊지 못할 그 밤을 보냈다.
최근에는 임관하는 여성검사들이 크게 늘어났지만 검찰에서 여성검사는 약 13.5%로 아직 소수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여성검사는 임관한지 5~6년째인 30기에서 36기에 포진하고 있고 부장검사 이상의 선배여검사는 몇 분 되지 않는다. 후배들은 선배들을 자주 만나 많은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받고 싶어 하지만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한번 모임을 갖는 일조차 쉽지 않다.
그래서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자리였고, 그런 모임을 꼭 한번 갖고 싶었는데 소원풀이 해주신 총장님께 정말 감사드리고 싶다.
참석했던 선배님, 후배님 다들 잘 돌아가셨는지요? 조희진 부장님 계셔서 그 자리가 더욱 빛났습니다. 김진숙 부장님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말을 끝으로 여성검사 워크숍의 그 잊지 못할 추억을 떠나보낸다.
남 에게 못할 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