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현일 기자의 시사펀치
중세봉건사회는 인간이 인간 위에 군림하여 지배하는 불평등한 시대였다. 신분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정해져 한번 노비로 태어나면 영원히 노비로 살다 죽어야하니 이보다 더 끔찍한 절망과 야만이 어디 있겠는가.
아직도 인도에는 중세의 카스트제도가 남아있어 불가촉천민을 신분화하고 있다지만, 이제 야만적 중세시대는 저물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사라졌을 것으로 여겨졌던 중세의 신분사회, 노예제도가 부활한 것이 드러나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바로 한국의 비정규직 제도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가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독일, 일본 등 16개 나라의 '비정규직-정규직' 이동성을 비교분석해 '비정규직 이동성 국가별 비교'(2013) 보고서를 냈는데, 우리나라는 영락없는 신분제도인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은 비정규직 가운데 11.1%만이 1년 뒤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고, 69.4%는 비정규직에 머물렀으며, 19.5%는 실직 등으로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집계 됐다. 즉 10명 중 단 한 명만 정규직 전환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네덜란드가 비정규직의 절반이 1년 뒤에는 정규직, 70%는 3년 뒤에 정규직 전환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와 비교하면 한국은 비정규직의 탈출이 불가능한 봉건시대의 신분제도로 고착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의미다.
더 심각한 것은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의 임금소득과 근로조건 불평등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고용노동부가 3만1천663개 표본사업체 소속 근로자 82만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월 임금 격차는 2008년 134만9천원에서 지난해 158만1천원으로 더 커졌다. 과거에는 학력차로 인한 불평등이 컸다면 비정규직 신분제도는 학력과 계층을 불문하고 보편적 현상이 돼버렸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 따르면 국내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지난해 비정규직으로 취업한 인력의 평균 연봉은 2천642만원으로 정규직 박사(5천498만원)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비정규직으로 취업하는 박사 학위자의 비율은 62.6%나 되는 점을 감안한다면, '가방끈이 길어도' 비정규직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비정규직 문제는 불평등과 차별의 원점이다.
비정규직제도의 야만성은 인권유린에서 절정에 달한다. 정규직 전환을 미끼로 수차례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하던 중소기업중앙회(중앙회)에서 일하던 20대 계약직 여성노동자가 자살한 사건은 노비제도에서 여성들이 당했던 수난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성의 비정규직 비율이 56%에 달한다는 점에서 두 명 중 한명은 성희롱과 성추행에 노출돼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살한 여성은 "24개월 동안 꽉 채워 쓰다 버려졌다"는 유서를 남겼다. 2개월, 4개월, 6개월 단위의 쪼개기 계약에 정규직 전환을 미끼로 성희롱에 고통받다 2년 뒤 계약해지까지 당하자 결국 자살에 이른 사건 앞에 할 말을 잃는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국정감사에서 26일 공개된 중앙회의 '2014년 하반기 임시직 활용여부 승인 여부 통보'라는 내부 문건을 보면, 중앙회는 각 부서에 계약직 노동자의 '쪼개기 계약'을 사실상 권장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6월에 중앙회 각 부서에 하달된 문건은 '동일인의 계속되는 근로계약기간은 11개월 초과 불가', '동일인의 누적 근로계약기간은 2년 초과 불가'라고 명시하고 있다. 문건은 "타부서 근속, 타인명의 활용, 계약해지 후 일정계약 후 재계약 등 어떠한 방법을 활용하더라도 동일인의 누적계약근로기간이 2년 이상인 경우 무기계약 대상이 되므로 각별히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는 '부연 설명'도 덧붙였다.
문제는 청와대와 집권여당이다. 고작 내놓은 것이라고는 정규직 전환 시 임금상승분의 50%를 1년간 지원하겠다는 있으나마나한 대책이 거의 전부니 말이다. 오히려 불평등과 비정규직 확산을 초래할 단시간 근로제 확대를 읊조리고 있으니 기막힐 노릇이다. 대체 누구를 위한, 어느 나라의 정부인가. 지난 25일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에서 삭발한 여성노동자들이 눈에 밟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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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노예는 영원한 노예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