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대제 정보통신부장관을 비롯, 노성대 방송위원장, 정연주 KBS 사장, 신학림 언론노동조합위원장 등 이른바 ‘4인 위원회’의 이날 모임에서는 디지털 TV 전송방식을 미국식으로 최종 합의함으로써 4년여간 끌어왔던 지긋지긋한 전송방식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디지털 TV 전송방식 합의는 국내 가전업계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참석자들은 “합의를 통해 방송방식 변경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 부담을 줄이고 사회갈등을 종식시키기로 했다”고 밝혔다.
평행선만을 달리던 정부와 시민ㆍ방송단체 간의 극한 대립 속에서도 끈기있게 추진해 온 대화와 타협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더욱 값졌다.
타협없는 자기 주장만을 제기하던 관행을 버리고 대화와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성숙된 모습을 보여준 사례라 할 만하다.
DTV 전송방식 합의는 대화와 타협의 산물
그러나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은 마치 끝이 없을 듯 치열한 논쟁 속에서의 지난한 여정이었다.
정통부는 1997년 디지털 장비 및 기술 개발을 추진하고 디지털 방송으로의 전환을 골자로 하는 지상파 방송 디지털 전환 기본 계획을 수립하고, 미국식 ATSC 방식을 정보통신정책심의위원회의 심의와 의결을 거쳐 국내 DTV 표준 방식으로 정했다.
디지털 TV 정책 추진은 1999년 상반기까지 순조롭게 진행돼, 수도권 전 지역은 2001년까지, 광역시는 2003년, 도청 소재지는 2004년, 나머지 지역은 2005년까지 DTV 가청 지역에 편입토록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디지털 지상파 TV 조기 방송 종합계획을 확정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미국 내 59개 방송사를 거느리고 있는 싱클레어 방송 그룹이 “미국식 디지털 TV 전송방식을 버리자”는 의견을 내놓은 것이다. 이같은 문제 제기는 미국의 유력 일간지 ‘뉴욕타임스’에 “미국식의 가장 큰 문제는 도심 난시청 지역이 생기고 이동수신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이라는 내용으로 보도되기에 이른다.
미국식 전송방식,‘미국발’암초에 부딪히다
미국보다 도시 건물 밀집도가 높고 산악지형이 많은 우리나라의 경우 난시청이 더 심각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다. 디지털 지상파 TV 조기 방송 종합계획을 발표한 지 두 달도 안 돼 뜻하지 않은 복병이 나타난 것이다.
2000년 8월8일 전국언론노동조합, 시청자연대회의, 한국방송기술인연합회는 디지털 방송 방식 재검토 촉구를 위한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식 ATSC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가 필요하며 유럽식과 비교하는 필드 테스트를 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으로 공식적인 반대 의사가 표명된 것이다.
언론노조를 비롯한 시민방송단체는 미국식 전송방식 철회를 주장하며 철야농성을 벌이는 등 강력 반발했다.
이어 12개 사회단체가 ‘미국식 디지털 방송 방식 재검토를 위한 시민대책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세계적으로 미국 방식을 채택한 곳은 미국, 캐나다, 한국 세 나라 뿐이다. 게다가 남한보다 산이 더 많아 유럽식을 채택할 가능성이 높은 북한과의 통일 이후 방송 호환을 고려한다면 더욱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통부는 이에 대해 “국내에서 이미 비교 검토해 결정한 방송 방식을 둘러싼 논쟁은 DTV 조기 도입에 따른 이점을 상실케 한다”고 반박했다.
또 “미국 방식은 HDTV가 가능하고 송ㆍ중계소 비용이 적게 드는 등 장점이 많으며 만약의 경우 제기되는 문제들은 얼마든지 개선될 수 있다”며 “더군다나 미국의 DTV 시장을 겨낭한 산업 연관 효과 등을 고려한 정책적 판단”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같은 DTV 전송방식을 둘러싼 논쟁은 갈수록 첨예해져 2002년에 이르자 “정통부의 오만한 관료주의를 확인한다”는 전국언론노조의 성명이 나오고 MBC가 전송방식을 유럽식으로 바꾸라고 공식 요청하는 등 갈등의 골이 깊어져 갔다.
급기야는 2003년 8월 언론노조를 비롯한 시민ㆍ방송단체들이 “방송위원회는 DTV로의 전환 일정을 전면 중단해야 한다”며 철야농성에 돌입하고 “총파업 불사”까지 밝히는 등 극한 대립 속으로 빠져들었다.
방송계 ‘총파업 불사’강력 반발
정통부로서는 심각한 상황을 맞아 반성과 함께 진지한 자문에 들어갔다. 과연 국가적 규모의 경영 손실을 극소화하는 방안은 무엇인가? DTV 도입의 생산성을 최대화하는 길은 무엇인가? 국민들을 만족시키고 기업인들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길은 무엇인가.
그간의 논쟁 속에서 정부의 대응 자세는 옳았는지 상대방 입장에서 고민도 하고, 정책 추진 과정을 다시 한번 살펴보며, 지금과 같은 논쟁이 어떻게 출발했고 어떻게 악화됐는지 심도있게 분석하고 토의했다.
그러자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다. 수 년간의 논쟁, 끝나지 않는 소모적 제로섬 게임 속에서 정통부는 ‘승자 아니면 패자 뿐이다’는 이분법적 접근이 반목과 불신의 원인이었다는 판단을 내렸다.
따라서 관련 당사자들 모두가 동일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참여자’라는 입장에서 서로가 승자가 될 수 있는 접근방법의 모색이 절실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이에 따라 정통부는 협상의 세 가지 기본 원칙을 설정했다.
첫째, 현행 미국식 유지의 당위성에 대해 최대한 설득력있는 논리를 개발하되 언론노조의 요구 중에서도 정당한 것은 과감히 수용한다.
둘째, 신속한 시스템적 대응 체제를 구축하고 지속적으로 대화를 추진한다.
셋째, 유연한 자세를 가지고 대화 상대를 존중하며 인간적으로 접근한다.
‘윈-윈’ 위한 대화 전략이 해결의 실마리
그간 문제 해결의 파트너면서도 실질적 대화가 부족했던 방송위원장에게 진대제 정통부 장관이 만남을 제안해, 2003년 10월4일 노성대 방송위원장과 진 장관은 전격 조찬 회동을 갖는다.
지난 7월8일 정보통신부 이재홍(오른쪽)국장과 라봉하(왼쪽) 방송위성과장이 디지털TV 전송방식을 둘러싼 4년간의 논쟁타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방송위 및 정통부, 방송계ㆍ학계ㆍ언론노조ㆍ산업계 관계자들로 해외합동조사단을 구성하고, 2001년 MBC 비교시험 결과에 대해 검증을 거친 후 KBS 비교 시험을 재검토한다는 합의를 도출했다.
또 같은 해 11월22일에는 한국정보보호진흥원장과 방송위 부위원장을 공동단장으로, 각계 전문가들이 참여한 해외조사단이 파견돼 ‘조속히 디지털 방송을 추진해야 세계시장을 선도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는 등 작은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언론노조의 농성은 그치지 않았고 방송위는 11월28일 기타 시군 지역의 디지털 TV 방송 허가 신청기한을 7개월 연기하라고 의결했다. 이에 대해 정통부는 ‘월권행위’라고 강한 유감을 표시함으로써 대립은 다시 격화되는 듯 했다.
위기 상황에서 정통부가 빼들은 카드는 다름아닌 또 한 번의 대화와 타협. 진 장관은 12월19일 방송 3사 사장단과 긴급 조찬회동을 가졌다. 이를 통해 해외조사단의 실태 조사 결과를 2주일 안에 공동 보고서 형식으로 작성해 발표하고, TV 공개토론회를 열어 여론을 수렴키로 했다.
또 워크숍을 열어 두 방식의 장단점을 객관적으로 비교하고, ‘유럽식이 우수하다’는 MBC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중립적인 검증 기구를 설치키로 합의했다.
열린 대화 위해 유럽식 주장 설명회 경청
이는 주무 장관과 방송사 사장들이 직접 나서서 전송방식 문제를 공론화함에 따라 점차 서로의 의견을 이해하며 타협해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놓은 셈이었다.
이어 지상파 4사 사장단이 12월26일 방송위에 광역시 소재 방송사들의 DTV 방송을 전송방식 논란이 종식될 때까지 연기해 줄 것을 요청했고, 정통부는 5대 광역시 지상파 TV 전환 일정 연기 요청을 수렴하는 등 적극적 타협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그리고 올림픽의 해 2004년이 밝았다. 전 세계 스포츠 제전이자 방송의 축제이기도 한 올림픽을 디지털로 시청할 수 있는지 여부가 전송방식 논의에 달려 있었다.
1월30일 방송위원장, 정통부장관, KBS사장, 언론노조위원장 등 4명은 자리를 함께 하고 훗날 ‘4인위원회’로 불려진 첫 모임을 가졌다. 지속적인 대화가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가고 있었던 것.
이날 모임에서 대표자들은 비교시험을 실시키 위한 ‘DTV 필드테스트 추진위원회’를 구성키로 합의했다. 추진위는 정통부 방송위성과장, 삼성전자 전무, 방송기술인연합회 정책실장, MBC 부국장 등 8명의 실무위원회로 구성됐다.
그리고 진 장관은 방송사 사장은 물론이고 언론노조 위원장, 한국노총 위원장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허심탄회하고 타협적 자세로 신뢰 기반을 구축하는 것을 최우선 전략으로 시행해 갔다.
이와 함께 정통부 실ㆍ국장급 간부들 역시 시민단체, 언론, 국회를 대상으로 지속적 설명회와 간담회를 개최했다. 이러한 노력은 청와대와 국정원, 국정홍보처 등에 대한 적극적 정보 제공으로 이어져 우호적 여론 조성으로 연결됐다.
갈등 해소의 모델 제시 의의
언론노조 정책실장을 정통부로 초청, 정통부 직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유럽식 도입 주장을 직접 경청한 일도 있었다.
디지털 TV 전송방식 합의로 방송계는 다채널 다매체 시대로 본격 진입하고 있다.
이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솔직한 입장을 전달하는 계기가 됐으며, 자기 주장만 내세울게 아니라 상대방 주장에도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태도가 ‘열린 대화’의 핵심임을 되새기게 한 단적인 사례였다.
효과적 대화채널 구축도 혁신적 변화였다. 시민단체와 긴밀한 관계를 가진 인사를 장관 정책보좌관으로, 방송계 원로인사를 방송정책자문관으로 영입해 시민단체와 방송계 사이의 대화 물꼬 트기에 주력했다.
이같은 종합적 협의체계를 통해 DTV 필드테스트 추진위원회 구성 이후 대타협이 이뤄진 7월8일까지 무려 31회의 4인 대표회의와 8인 실무위원회를 열었다. 평균 5일에 한 번씩 모임을 가진 셈이다.
이같은 잦은 만남은 서로의 입장을 보다 잘 이해하고, 서로를 배려할 줄 아는 감정으로 연결되면서 마침내 “미국식을 변경할 경우 엄청난 사회적, 경제적 비용이 들므로 이를 변경하는 것은 바람지하지 하지 않다”는 7월8일 대타협에 이르게 된 것이다.
“만족하지는 못하지만 합의를 통해 갈등을 종식시키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언론노조 DTV 특별대책위원장)“방송방식을 변경할 경우 야기될 사회적, 경제적 비용을 감안해 현재의 방송방식을 변경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습니다" (정통부 방송위성과장)
우리 사회는 갈수록 복잡하고 다양해진 각양각색의 갈등구조를 지니고 있어 합의에 이르기가 좀체로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DTV 전송방식 논란의 해소 과정은 그러한 다중적 갈등을 평화적으로 푸는 해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디지털TV 전송방식 확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