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진 법원행정처 판사는 24일 우리나라에 근대 사법제도가 도입된 이래 100여년 동안 유지되어 온 직업법관에 의한 재판제도는 공정하고도 효율적인 사법정의를 실현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해왔으며 안정된 제도로 정착됐다.
한편으로 민주화 다원화·국제화의 커다란 흐름 속에서 국민들은 성숙된 역량을 바탕으로 ‘국민을 위한 사법’을 넘어서서 ‘국민의 사법’으로의 전환을 기대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수년 전부터 사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제고하고 재판에 다양한 가치관과 상식의 반영, 사법에 대한 국민의 감시 등을 위해 국민의 사법참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여론조사 결과 80% 이상의 국민이 일반시민이 판사와 함께 재판에 참여해 판결을 내리는 제도의 도입에 찬성했으며 이에 따라 보다 공정하고 신중한 재판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사법개혁위원회는 국민의 사법참여에 대한 시대적 요청을 수용하고 국제적 기준에 맞는 사법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공청회를 열어 각계각층의 의견을 청취하고 사법참여제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
그 결과 국민과 사법부의 역량을 두루 감안해 볼 때 더 이상 미룰 필요 없이 사법사상 처음으로 국민이 재판에 직접 참여하는 제도를 도입하여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즉 현실적인 여건 등을 고려해 완화된 형태의 ‘1단계 국민사법참여제도’의 시행을 거쳐 2012년에는 우리나라에 적합한 ‘완성된 형태의 국민사법참여제도’를 시행할 것을 건의하기로 한 것이다.
국민의 사법참여제도는 사법의 민주적 정당성을 강화하고 투명성을 제고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국민으로부터 신뢰받고 존중받는 사법을 확립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사법참여제도의 도입은 현행 사법제도의 근간을 바꾸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우리나라의 법체계와 현실에 가장 적합한 사법참여의 형태를 신중하게 연구하고 설계해 나갈 필요가 있다.
사법참여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① 검찰권 행사에의 국민참여 ② 법관(검사) 임명과정에의 국민참여 ③ 재판과정에의 국민참여 ④ 기타의 국민참여제도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재판과정에의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민사재판 조정위원제도, 시민사법모니터제도에 그치고 있다. 이는 다양한 형태의 국민의 사법참여를 보장하고 있는 여러 외국에 비해 매우 저조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대법원은 지난 6월 전국의 사법부 구성원 전체(판사 및 일반 공무원)에 대해 국민의 사법참여 등에 관한 여론조사를 실시, 상당수가 가까운 장래에 배심제나 참심제를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56.49%) 국민참여제도를 도입하는 경우에 형사재판에 우선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고 답했다(64.55%).
사법부 56%가 형사재판에 우선적 도입 원해
도입 형태에 관해서는 참여하는 국민이 판사와 함께 유·무죄 결정 및 양형에 관한 판단을 하는 독일의 참심제 방식을 (36.86%) 선호했으며 미국 배심제 방식(28.80%) 일본 혼합방식(24.24%)이 그 뒤를 이었다.
배심제란 일반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직업법관과 독립해서 사실문제에 대한 평결을 내리고, 법관이 평결결과에 구속되어 재판하는 제도를 말하는데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러시아, 스페인, 홍콩, 스리랑카, 사이판 등 50여개국을 들 수 있고, 러시아와 스페인은 1990년대에 배심제를 부활했다.
배심제를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쪽은 직접주의에 기반한 철저한 집중심리가 불가피하므로 충실한 재판이 가능하고 오판을 줄일 수 있으며, 상식에 기한 판단이 이루어지므로 일반인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재판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다.
참심제란 일반시민인 참심원이 직업법관과 함께 재판부의 일원으로 참여해 직업법관과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사실문제 및 법률문제를 모두 담당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는 유럽대륙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제도로서 13세기경부터 실시된 스웨덴이 가장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독일, 프랑스, 이태리,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등이 대표적인 참심제 실시 국가이다.
한편 스웨덴 등 일부국가는 배심제를 병용하고 있기도 하며 이웃 일본은 검사의 불기소처분에 대한 심사를 하는 ‘검찰심사회’ 제도를 강화하는 한편 최근 ‘재판원제’라는 이름의 형사재판 참심제에 관한 입법을 마련하고 2009년 5월 이전에 시행할 계획이다.
일본은 2009년까지 형사재판 참심제 시행
참심제를 도입할 경우 직업 법관에 대한 민주적 견제와 감시기능을 할 수 있으며 국민에게 재판 및 심의 과정이 실질적으로 공개될 수 있다. 배심에 비해 비용이 적게 들고, 일반인의 정서적 판단에 따른 오판도 막을 수 있다.
프랑스나 독일이 배심제를 실시하다가 참심제로 변경한 것은 배심에 의한 무죄평결과 편파적인 결론에 기인하는 점이 크다. 프랑스 경우 형사중죄에 대한 배심재판에서는 무죄율이 약 12% 정도였으나 참심제로 전환한 이후에는 5% 정도로 감소했다는 결과가 있다.
사개위는 헌법적합성, 양제도의 장단점, 소요비용과 효율, 각계각층의 여론, 국민 문화, 소송절차 등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 배심제와 참심제 중 어느 모델이 우리의 현실에 적합한지는 단언하기 어려운 점이 많아 향후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기본 모델을 정한 후 이를 한국적 현실에 맞게 변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변용 방향을 정함에 있어서는, 적정 배(참)심원 수의 산정, 배(참)심원 선발절차의 간이화, 심리과정에서의 배(참)심원과 직업법관과의 충분한 의사소통구조의 확보, 배(참)심원 등의 평결방식과 권한의 조정, 공판준비절차 및 공판절차의 개선, 상소권의 충분한 보장, 항소심 구조의 개선 등을 고려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제도의 도입을 위해서는 모의 배심(참심)재판, 국지적 시범재판 등을 통하여 문제점을 연구해보고, 관련 입법을 제정하여 준배심(참심)제를 실시하여 그 성과를 분석하며, 그 결과에 따라 배심제 또는 참심제 중 기본적인 형태를 선택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모의재판 등 통해 기본적 형태 정해야
8월 26일 처음으로 법원이 실시한 모의재판 결과에 의하면 배심원이나 참심원으로 참여한 시민들은 모두 합리적이며 진지하게 평의를 했으며 법관이나 다른 배·참심원에 의해 무리하게 이끌린 경우는 없었던 것으로 평가됐다.
모의재판은 실제 사건을 모델로 오전에는 배심재판, 오후에는 참심재판을 진행했는데 배심재판은 미국식(판사 1＋배심원 12), 참심재판은 독일식(판사 3＋참심원 2)을 원형으로 진행해 상호 대비효과를 거두도록 했다.
사개위가 추진하기로 한 1단계 제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배심·참심 요소를 혼용한 제도를 모델로 법관의 지도 하에 일반시민들이 피고인의 유무죄에 대한 논의 후 의견을 개진하며 유죄로 합의가 이루어진 경우 형량에 대한 의견도 개진하도록 한다. 이때 일반시민의 의견은 권고적 효력을 갖게 된다.
재판부는 직업법관 3인과 일반시민 5~9명으로 구성되며 일반시민은 선거인명부, 주민등록전산자료 등을 통해 선발된 후보자 가운데 선발 신문절차를 거쳐 뽑히게 된다.
법원은 준비절차에서부터 공판진행계획을 수립하고 집중심리, 연일개정을 통해 공판중심주의를 구현한다는 계획이다.
1단계 제도의 대상이 되는 사건은 일정한 범위의 중죄 형사사건으로 다만 피고인이 국민사법참여재판을 희망하지 않는 사건은 제외하게 된다.
한편 우리 헌법은 제27조에서 "모든 국민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해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헌법 제105조, 제106조에서 법관에 대해 임기, 탄핵 등에 의하지 않는 한 파면되지 않도록 하는 등의 신분보장을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반 시민의 재판참여가 위헌인지 여부가 문제될 수 있다.
이와관련 대법원은 한국공법학회에 연구를 의뢰하기도 했는데 결론은 제도설계와 관련해 배심·참심제를 도입할 때 어떤 지위와 권한, 역할을 배심원·참심원에게 역할을 부여하느냐, 이 때 법관의 역할과 지위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느냐에 따라 위헌·합헌의 결론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헌법 문제 이외에도 혈연·지연·학연 등의 연고주의적 정서의 배제, 사법비용의 증가 등 우리나라에 뿌리내리기 위한 전제조건의 충족 여부, 제도의 도입이 우리나라의 사법발전에 기여할 것인지 여부 등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준참심(배심)제의 실시에는 ‘법관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의 침해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향후 3년 이내에 관련 입법을 제정해 시범적으로 시행하고 일정기간 동안의 성과를 보아 그에 관한 분석 평가 후 5년 이내에 우리나라에 적합한 모델을 확립하여 시행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
그에 관한 준비와 시행 및 향후 국민의 바람직한 사법참여방안에 관해 지속적으로 연구와 추진을 담당할 전문적인 연구 추진기구를 설치해 장기적으로 구체적인 제도설계를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 대법원장은 11월 2일 대통령에게 추진기구의 설립을 건의한 바도 있다.
연구 추진 기구의 과제로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실현여건의 성숙을 위한 방안 검토다. 모의재판을 실시하거나 준참심, 준배심 형태의 제도를 도입 또는 운영하는 일이다. 또한 제도 실현에 대비해 사법제도 및 관행을 정비하고 인적·물적 여건을 확충해야 한다. 증거법을 재검토하는 한편 법률 용어의 순화 작업도 필요하다. 절차 운영자에 대한 교육 및 훈련도 있어야 할 것이다.
국민의 사법참여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법률가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준비 뿐만 아니라 전국민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요청된다. 또한 사법참여제도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마련되고 그 제도가 우리나라에 굳건히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법제도와 현실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검토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나아가 국민이 사법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참여해 공정한 판단자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사법에 참여하는 국민과 법조계가 서로 신뢰하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하는 데에도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대법원을 비롯한 관계기관의 협조와 국민들의 뜨거운 동참에 힘입어 우리나라에서 실시될 국민의 사법참여제도가 국제사회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모범적 제도로 이 땅에 정착됨으로써 우리의 사법제도와 국가의 위상이 한 단계 올라가는 결실을 거둘 수 있기를 바란다.
사법참여제는 법 정당성 강화·투명성 높여
